♥ 女子와 친정(親庭) ♥
친정은 ‘시집간 여자의 본집(本家)’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 <民法>에서는 ‘여자가 결혼생활을 하다가 離婚을 하면 친가(親家)로 복적(復籍)하거나 일가(一家)를 창립(創立)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여자에게 있어서 親庭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남성 중심의 家父長制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더라도 남자가 호주(戶主)가 된다. 다시 말해서 위로 딸이 아무리 많아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막내 남동생이 호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부에서는 호주제의 불합리성을 주장하고 호주제 폐지(廢止)를 이끌어냈고, 얼마 전에는 모 문중(門中)에서 여성들이 재판에서 승소(勝訴)하여 여성도 종중회원(宗中會員)이 될 수 있다는 최종판결을 받아냈다.
과거에는 딸이 결혼을 하게 되면 出嫁外人이라 하여 친정과는 거의 왕래를 하지 않고 살았기에 ‘시집을 간다.’는 말이 생겨났다. 하지만 요즘에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어서 결혼을 하더라도 친정에 자주 드나들 수 있고 아들이 없거나 능력이 없는 경우 딸이 친정부모를 부양(扶養)할 의무(義務)가 있다.
지난 7월 27일은 친정아버지의 생신이었다. 아버지는 1929년 뱀띠 생으로 올해 77세 되신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의 8남매의 맏아들이라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을 하시고 만주로 가셔서 자동차 운전과 정비기술을 배우셔서 평생 동안 직업은 운전기사로 일관하셨다. 지금은 당뇨증세가 있고 관절이 좋지 않은 것을 빼고는 비교적 건강하시기에 다행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지금도 인물이 곱상하셔서 가끔씩 체크무늬의 베레모와 선글라스를 쓰시고 차를 몰고 나가시면 내가 보아도 멋진 모습이시다.
어머니는 75세인데 곱상한 아버지와는 달리 젊어서 생계를 도맡아 하시느라 돼지 뜨물지게를 지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많이 하셔서 허리가 약하고 등이 약간 굽었다. 아버지는 권위적이셨는데 지금은 어머니한테 꼼짝도 못하신다.
나는 4남매의 맏딸이다. 나와 3살 터울의 여동생은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고 외아들은 올해 대학교에 들어간다. 나와 여동생은 여상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친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와 5살 터울인 큰 남동생은 부모와 누나 덕분에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이십대 후반에 사업을 시작했는데 경험 부족으로 십여 년 만에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예전에 연금보험을 많이 들었지만 돈이 아쉬워서 하나씩 해약해서 쓰고 지금은 정기적인 수입이라고는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돈이 전부다. 나 역시 아이들이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정기적으로 많은 돈을 드리지는 못하고 생신이나 명절에만 목돈을 드리고 있다.
생신 며칠 전에는 시원한 모시로 만든 사각팬티와 파자마를 샀다. 나는 전에 통가죽 신발을 샀지만 별로 신을 일이 없어서 두었던 구두를 어머니한테 드리려고 잘 싸두었다. 집에 있던 인형은 조카한테 주려고 챙겨두었다.
큰아들은 학원에서 늦게 돌아온다고 하고 작은 아들은 안면도에 놀러갔다 돌아왔는데 과외아르바이트 시간이 겹쳐서 못 가게 되어 나 혼자 퇴근해서 옷을 갈아입고 물건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날씨는 덥고 쇼핑백이 두 개나 있어서 케이크를 사지 못했는데 친정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20kg짜리 쌀을 사서 배달을 시켰다. 내가 늦게 도착하니까 친정식구들은 기다리다가 저녁을 먹은 후였는데 케이크는 올케가 사다 놓았다. 나는 부모님께 약간의 돈을 드리고 디카로 사진을 찍고 간단하게 차려달라고 해서 먹었다.
어머니가 “서서방은 왜 같이 오지 않았니?”하시기에 “오늘 회사에서 회식이 있대요.”하고 얼버무렸다. 지난번 어버이날에도 나 혼자 다녀왔는데 굳이 간다고 하지 않아서 자존심 때문에 가자고 재촉하지 않았던 것이다.
큰 남동생의 딸 유라는 대학생인데 방학이라 집에 다니러 와 있고, 바로 아래 원일이는 내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막내 남동생의 딸 혜주와 원혁이도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는 조카들이 상급학교에 올라갈 때마다 입학 축하금을 건네주고 있다. 이렇게 집안에서 맏딸 노릇하기가 무척 어렵다.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친정에 행사가 있을 때는 카메라를 가지고 간다. 그렇게 해서 부모님을 찍어드린 사진이 꽤 많다. 어머니가 소불고기 잰 것과 반찬거리를 싸주셨는데 남동생이 버스정류장까지 자동차로 바래다주면서도 매형에 대한 아무런 말이 없다. 남동생은 예전에 남편이 사업을 하면서 시숙과의 돈 문제로 처부모와 껄끄러운 사이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올 때 두 보퉁이를 들고 오다가 주안역 근처에서 큰아들을 만났는데 “엄마 이리 주세요,”하면서 얼른 받아든다. 아들이 “엄마 지금 오세요? 아빠는 같이 안가셨어요?”하기에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본다. 나는 “그래도 당신이 뒤따라올 줄 알았는데..”했더니 “미안해. 내가 내일 어머니한테 전화를 드릴께.”한다. 나는 부모님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디카사진을 포토프린터로 인쇄하여 갖다드리려고 한다.
여자에게 있어서 친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는 곳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남동생 집이 친정이 되는 것이다. 남동생은 사업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나이 보다 늙어보여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한다.
友瑛 2005. July.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