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구(食口) ♧
食口란 ‘한집에서 같이 살며 한 솥의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부부를 기초로 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가족(家族)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가족은 영어로는 ‘Family’인데 이 말의 어원(語源)은 ‘Father Mother I Love You’에서 나왔는데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는 얼마 전에 소설가 김별아씨가 쓴 [식구]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읽었다. 작가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모습과 결혼 후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가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하고 의문(疑問)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책을 거의 읽을 무렵에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예전의 어머니가 다 그랬듯이 작가의 친정어머니는 가부장제(家父長制)하에서 전형적인 현모양처(賢母良妻)였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는 대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간혹 밥이 설거나 질게 지어졌을 경우 아버지는 밥상을 뒤엎었고 어머니는 그것을 치워야 하는 초라한 입장에 서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친정어머니를 떠올렸다. 어쩌면 딸들이 생각하고 있는 친정어머니는 하나같이 무능하고 바보처럼 살았을까?
당시에는 여자들이 배우는 문제에 있어서도 오빠나 남동생한테 양보의 차원을 넘어서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정이 어려운 경우 딸들은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기꺼이 학습수혜권(學習受惠權)을 반납하고 돈을 벌기 위해 공장이나 식당으로 나가야했다. 그렇게 해서 딸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오빠나 남동생의 책값이 되고 용돈이 되고 쌀값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나 오빠나 남동생이 식구를 위해 희생한 딸이나 오누이의 공로(功勞)를 인정하기는커녕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성공한 남동생이 배우지 못한 자기 오누이를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다.
딸이 혼기(婚期)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면 아버지 대신 남편이 권력자가 되어 다스리게 된다. 남편은 자신이 밖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것만 계산을 하고 전업주부인 아내가 하루종일 집안에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집에서 논다’고 단정을 짓는다. 나는 아무리 아파도 청소와 설거지를 한번도 밀려놓지 않았고 아침밥을 건너뛰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이 아프면 식구가 다 알도록 소란을 피우지만 아내가 아파서 누워있으면 인상을 찡그리고 만다. 아내를 마치 사다놓은 만능 가전제품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전제품도 오래 사용하면 A/S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남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경제력을 가지게 되면서 발언권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IMF는 남자들한테 치명타를 안겨 주었고 여자들이 강해질수록 상대적으로 남자들의 기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趨勢)가 계속되자 드라마 속의 남자들이 앞치마를 입고 여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벌어서 권리를 되찾겠다고 나섰다.
나는 여상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운수회사]에서 경리사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친구의 소개로 남편을 알게 되어 1980년 5월에 결혼을 했다. 시댁은 과거에는 부유했지만 가세(家勢)가 기울어져서 내가 결혼할 무렵에는 방을 얻을 돈이 없어서 사글세를 얻어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남편은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기에 비위를 맞추어야 했고 여러 차례 사업을 한다고 일만 벌여놓고 수습은 내가 해야 했다. [바로크가구]에 다니던 남편이 시숙과 동업으로 그 회사와 계약을 맺고 신축아파트에 가구를 설치해 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93년에 시작할 때는 한창 건설경기가 붐을 이루고 있어서 한달에 수천만 원의 매출이 올랐다. 하지만 남편은 돈 관리를 잘 못해서 자금(資金)을 비축(備蓄)하지 않았다.
1998년에 IMF로 인하여 건설경기가 침체상태에 빠진데다 천만 원의 마이너스통장 대출을 받았고, 외상으로 갖다 쓴 공구 값이 밀리게 되자 시숙이 손을 떼고 말았다. 은행에서는 대표자인 남편 명의로 된 대출금의 상환을 독촉하기 시작했고 부가가치세가 밀려서 세무서에서도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우리 부부는 “ 왜 당신 혼자 그 빚을 떠맡느냐?”는 내 말에 싸움이 잦았다. 은행에 보증을 선 친정아버지께서는 나한테 “어떻게 할 거냐?”고 채근을 하셨는데 다급해진 나는 처음으로 ‘전자회사’의 생산직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내 경우처럼 남편이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위안을 삼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사장님한테 사정을 해서 사장님이 거래은행에 보증을 서고 대출을 받아서 마이너스통장을 해결하고 3년 동안 내 급여에서 대출금을 갚았다.
남편은 2년 가까이 백수생활을 하다가 내가 전자회사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인지 ‘헬스클럽’에서 같이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분의 소개로 제철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어느 정도 빚을 갚았다. 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늦깎이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던 학사모를 쓰게 되었다. 아직도 아이들의 교육비 때문에 여유가 없어서 아직은 승용차를 굴리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희망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권위적이고 자신만 알고 아내를 배려할 줄 모르던 남편이 180도로 바뀌었다. 시댁 집안의 경조사(慶弔事)에는 꼭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려고 하고 시댁 친척들한테는 내 덕분에 이만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도 잘 키웠다고 아내자랑을 한다. 남편은 가끔씩 전화로 불러내어 외식을 하자고 하고 손수 재료를 사가지고 와서 직접 해물파전을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도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받는 날에는 통닭을 사가지고 들어온다. 오늘도 남편이 조갯살과 물오징어를 사가지고 들어와서 해물파전을 만들었는데 마침 아들도 통닭을 사가지고 들어왔기에 사진으로 남겼다. 이렇게 서로를 고마워하고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바라보는 마음은 바로 가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友瑛 2005. June.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