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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내버스

     

 

                                 ♣ 시내버스 ♣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직후인 1949년에 처음으로 버스가 등장하였는데 벌써 60년이 되었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17개 운수회사에 운송사업 면허를 주고 273대가 운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7,600대가 운행 중에 있다고 한다.

 올해 연세가 81세이신 친정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후 만주로 가셔서 자동차 운전과 정비기술을 배우셔서 한국전쟁 때는 운전병으로 복무하셨고, 제대 후부터 택시와 트럭 등을 운전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차폭이 좁은 합승이 운행되었는데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내버스가 대중화된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11호 자가용이라고 부르는 도보로 다녔다. 나 역시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너무 멀어서 아예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중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안에서 동인천역까지 기차로 통학했는데 아침에는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과 학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나는 1973년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 구로동에 있는 B운수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지금은 <구로 디지털단지>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당시 구로동에는 수출에 힘입어 공단지역이 형성되면서 출퇴근 시간에는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로 늘 초만원을 이루었다.

 내가 근무하는 운수회사에서는 출근시간에 예비차를 운행하여 배차간격을 좁히고 승객들한테 편의를 제공하였다.


 버스에는 운전기사 외에 버스 안내양이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들이 격일제로 교대근무하고 있었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모자와 주머니가 달린 상의에 바지차림으로 허리에는 잔돈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달린 가방을 착용했다.

 안내양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마치고 지방에서 올라와 생활비와 학비를 보태면서 가장노릇을 하는 또순이들이었다. 그들은 운수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숙식하면서 월급을 고스란히 모을 수 있었다.

 당시는 회수권을 발행하였는데 안내양들이 현금과 회수권을 받아 버스가 종점에 도착하면 경리과에 입금하면 경리사원이 매회 마다 운행일지에 금액을 기록하고 확인도장을 찍어주었다.


 1988년에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시내버스 안내양제도가 없어졌다. 대신에 버스마다 요금함을 부착하여 승객이 직접 토큰을 넣었고, 지금은 교통카드로 바뀌어 단말기에 대면 요금이 정산된다.

 197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경인전철이 등장했지만 시내버스는 늘 대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자가용이 있지만 지금도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승객 수가 28%나 되어 줄어들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자가용을 소유하는 가정이 증가하였다. 요즘은 장기불황으로 조금 주춤했지만 종전에는 전세를 살아도 자가용을 소유하는 추세여서 집집마다 한 대씩은 다 갖추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아파트 주차장에 승용차들로 꽉 찬다.

 경기 불황 여파로 주택가 이면도로에는 자가용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방치되어 있는 것을 종종 몰 수 있다.


 엊그제 서울시에서는 시내버스 탄생 60주년을 맞이하여 11개 노선에서 ‘추억의 버스 안내양’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요즘에는 시내버스 안에 에어컨 시설과 난방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통로가 넓어서 목적지까지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작은 택시 보다 오히려 시내버스가 더 편하게 느껴진다.


               友瑛. 2009. JUNE. 20

 

                       운수회사 경리사원으로 근무할 당시 사진 (1973~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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