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림초등학교23회 동창생 첫 모임 ♠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입학 연령이 8살(만 7살)로 돼 있어서 14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초등학교는 하얀 도화지처럼 백지상태여서 가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게 된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생활여건이 좋아져서 발육상태가 좋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하다. 하지만 예전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주거생활도 열악했고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늘 배가 고팠던 기억이 난다.
친정아버지는 해방 전에 만주로 가셔서 자동차정비와 운전기술을 배우시고 합승과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했지만, 8남매의 장남이어서 할머니와 나 보다 3살 위인 막내삼촌을 부양하느라 우리 집은 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이처럼 가난한 가정의 4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경제력이 약한 아버지 대신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를 도와 부엌에서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집에 돼지와 토끼와 닭을 키웠을 때는 토끼에게 먹일 풀을 뜯어왔고, 돼지우리를 청소했으며, 집안청소와 동생들을 씻기고 신발을 빨아서 널었다.
봄이면 부처산과 밭둑을 오가면서 냉이와 씀바귀를 뜯으러 다녔다.
친구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끼리 서로 어울려서 노는데, 언제나 학교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나에게는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도 사치에 불과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대전에서 사시던 할머니가 막내삼촌과 인천으로 오셔서 단칸방에서 살았다. 당시는 중학교 입시가 비평준화였는데 선인재단에서 만든 [선인중학교]는 다른 중학교 입시에서 탈락한 학생들도 정원 외로 입학이 허용되었다. 어머니는 공부하기를 무척 싫어하는 막내삼촌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고 공부에 관심이 많은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켰는데 이를 두고 할머니께서 “계집애가 국문만 깨우쳤으면 됐다. 그럴 돈이 있으면 막내를 공부시켜라”고 부모님을 나무라셨지만 어려운 형편에 학생 둘을 가르칠 수 없어서 할머니가 화를 내시고 삼촌을 데리고 대전으로 내려가셨고, 삼촌은 공장에 다녔다. 내가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 막내삼촌이 찾아와서 “너는 공부를 했지만 나는 공부를 하지 못해서 올바른 직장에 다니지 못하고 있으니 부모님한테 얘기해서 장사 밑천을 마련해 달라.”고 했고, 내가 “삼촌이 원하는 것을 해주세요.”라고 했지만 허사가 되었다.
만일 삼촌이 공부에 열중했거나 내가 공부를 못했다면 나는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을 것이다.
나 보다 3살 아래인 여동생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기가 바쁘게 가방을 던져놓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늦은 시각에야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맏딸인 나한테 많은 부분을 의지하셨다. 하지만 시험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오라고 배려해주셨는데 우리 집보다 훨씬 형편이 나은 친구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시험공부를 한 기억이 난다. 나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남한테 지는 것을 싫어해서 단칸방에서도 밥상을 펴놓고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교대를 나와서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중학교 1학년 가을에 12살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나 소아마비에 걸리는 바람에, 가정형편이 더욱 나빠져서 인일여고가 아닌 실업계여고로 진학했고 내 꿈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서림초등학교에 다닐 때 한동네에 살면서 친하던 한 친구인 O를 [서림초등학교] 인터넷 동창카페에서 만났다. 친구 O와는 한 동네에 살아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자주 만났고 절친했다. 하지만 각자 중학교가 달라서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살던 동네가 철거되었는데 집에 전화가 없었고 다른 곳에서 살다 보니 42년 동안 소식을 모르고 만날 수가 없었다.
친구 O는 결혼 후 대구에서 32년 동안 살고 있는데 마침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인천에 오는 길에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서림초등학교 23회 동창들도 함께 만나면 좋을 것 같아서 휴대전화번호로 연락이 되는 친구들한테 알리고 26회 후배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첫 모임을 갖기로 했다.
43년 만에 만난 친구 O는 오십대 중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초등학교 때는 나하고 키가 비슷했는데 고등학교 때 부쩍 자라서 163cm이다.
서림초등학교 동창생 대부분이 부처산 자락의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했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모두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동창생의 자식들도 대부분 대학교를 나와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다.
O친구를 환영하는 자리 겸 모인 23회 첫 동창모임에는 16명의 남녀 동창생 친구들이 참석했는데 식사 후 한 동창이 운영하는 라이브음악카페에 가서 음악을 감상하고 O친구는 ‘라노비아’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자식은 품안에서 떠나가고 남는 사람은 배우자뿐이다. 하지만 배우자도 언젠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바로 동창생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정신적 외로움이라고 한다.
내가 어려서는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나 혼자만 열심히 살년 되는 줄 알고 살았지만, 여고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피붙이 형제 말고도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만난 직장동료나 사회 친구는 어딘지 모르게 이해상관에 얽혀지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수십 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친구는 만나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초등학교 시절 童心으로 돌아간 것처럼 편안하다.
友瑛. 2009. February. 26
7080 라이브카페
서림초등학교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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