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업 42년 만에 [서림초등학교] 동문회를 다녀와서 ♧
나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정월 생으로 태어나 7살인 1961년 서림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는 초등학교가 많지 않아서 교실이 부족하여 콩나물시루처럼 한 반에 보통 70명 이상 공부를 해야만 했다.
요즘 학생들이 한 반에 30명 남짓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히터가 나오는 쾌적한 환경 속에서 공부하는 것에 비하면 무척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었다. 여름에는 교실이 부족하여 비가 새는 천막교실에서 공부를 했고, 겨울에는 석탄을 물에 개어 뭉쳐서 만든 조개탄이나 장작을 때서 한기(寒氣)를 녹였다.
당시에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이 나라에서 먹고사는 일 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교육정책이었다. 40~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가 비슷한 후진국 환경에 처해있던 동남아국가들과의 차별성이 있었다면 바로 정부의 교육정책과 부모의 높은 교육열이었다.
한국인에 있어서 교육(敎育)의무는 국방(國防), 근로(勤勞), 납세(納稅)의무와 더불어 국민의 4대 의무에 속하는데 지금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돼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요즘 수업료에 해당하는 기성회비를 내지 못하면 담임선생님이 해당 학생을 불러서 독촉하였고,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언제까지 가져갈 수 있는지 대답을 알려드려야만 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늘 기성회비를 뒤처지면서 냈지만 학년이 바뀔 때마다 나의 담임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내가 안쓰럽게 보였는지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충청북도 태생으로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만주로 가셔서 운전과 자동차 정비를 배우셨고 해방 후 운전기사로 직장생활을 하셨다. 인천으로 분가했지만 8남매의 장남으로 할머니와 형제를 부양하시느라 생활이 늘 궁핍하여 어머니가 남의 집 밭일을 하거나 돼지나 닭을 길러서 살림에 충당하셨다. 그래서 나의 초등학교 시절 저학년 때는 도시락을 제대로 싸가지 못해서 학교에서 제공하는 옥수수빵을 배급받아 먹거나 소풍가는 날 김밥을 싸가지 못해서 소풍을 가지 못한 배고팠던 추억이 있다.
5학년이 되어서야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도시락을 싸갈 수가 있었고 6학년 때는 춘천다목적댐으로 졸업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을 치러야했는데 나는 문제집만으로 공부를 하여 원하는 [인천여자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6학년 12반 강낙희 담임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중학교에 진학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맏딸인 나한테 선생님의 배려와 격려가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셨기에 지금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친정부모님이 나를 낳아서 길러주셨다면, 강선생님은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주셨다.
나는 늘 어려웠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던 초등학교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올해 우연히 [서림초등학교] 동문카페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카페 주소를 찾아가서 가입을 하고 자주 들어간다. 2008년 12월19일은 방송대 기말시험을 이틀 앞두고 있었지만 총동문회에 참석하였는데 송년회 장소에서는 입구에서 기수와 이름을 적은 표찰을 나누어주고 기수별로 좌석을 배치하였다. 나는 23회 남녀동창생 몇 명을 만나고 같은 반이던 L을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서림초등학교]를 졸업한지 무려 4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식사와 건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오랜 시간의 갭(Gap)을 허물어버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나는 올해 처음 동문회에 참석했지만 해마다 동문회에 참석하여 동창생을 비롯하여 선후배와도 돈독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友瑛. 2008. December. 27
서림 동문카페
동문회에서 내 모습
서림초등학교 앨범
6-12반
서림초등학교 졸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