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전상서♥
어머니!
제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도 지금까지 엄마라고 불러왔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어머니라고 불러봅니다.
제가 낳은 자식이 벌써 결혼 적령기가 되었지만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뵐 때는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어린애가 되어버립니다. 제가 친정에 갔을 때 어머니가 안 보이면 왠지 마음이 허전합니다. 이제 석 달만 지나면 또 한 살이 늘어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팔순이 되시고 어머니는 일흔여덟이 됩니다.
어머니는 일찍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맏딸로서 외할머니께 효도를 다하였고, 꽃다운 스물한살의 나이에 찢어지게 가난한 여덟남매의 장남인 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할머니의 고된 시집살이를 십 년 동안이나 참아내셨습니다. 외가인 인천으로 이부자리만 가지고 오셔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들 공부만큼은 반드시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셨기에 우리 사남매가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셔서 자동차 정비와 운전기술을 배우고 해방 후에는 택시와 합승, 시내버스를 운전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운전기사가 귀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하셨습니다. 그런데 접촉사고나 人死事故가 나면 전부 운전자가 부담하고 정지(停止)를 당하면 여러 달씩 쉬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 계시고 어머니가 가정경제를 이끌어나가다시피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의 밭에서 품일을 하거나 다라이에 떡과 생선을 받아 다른 동네로 다니면서 파셨는데 자식들을 생각해서 떡을 몇 개씩 남겨가지고 오셨습니다. 어머니의 고생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자식들은 매일같이 떡을 먹게 되어 늘 신이 나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마당에 수도가 없는 산중턱에 있는 달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제 아래로 세살 터울인 여동생과 다섯 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었는데 평상시는 거의 보리밥을 먹고 밀가루에 소다와 막걸리를 넣고 발효시킨 반죽을 쪄서 간식으로 먹거나 감자와 옥수수를 쪄서 먹었지만 늘 허기가 졌습니다. 밀가루 수제비는 지겹도록 먹어서 지금은 밀가루 음식을 싫어합니다.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이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처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었을겁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많이 배우지 못했기에 딸한테는 공부를 시키고 싶어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참고서만 가지고 공부를 해서 당시 경기도에서 秀才들만 들어간다는 <인천여자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합격소식을 알려주셨지만 부모님과 함께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 동인천에 있는 음식점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식을 했는데 어머니가 “무얼 먹고 싶으냐?”고 물으셔서 떡국이라고 대답을 하고 맛있게 먹던 기억이납니다.
저는 정말로 하얀 쌀로 만든 떡국이 먹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시 2년제였던 <인천교육대학교>를 나와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휴일에 동네 아이들이 산수문제를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면 양철다라이를 벽에 걸어놓고 분필로 문제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1학기에는 반에서 60명 중에 15~20등을 유지했습니다. 1학년2학기인 10월에 어머니가 막내동생을 낳았는데 소아마비로 판명되어 그때부터 어머니는 동생을 고쳐보겠다고 전국에서 용하다는 곳은 다 다니셨습니다.
저는 집안일과 동생을 보살피면서 학교에 다니다 보니 성적이 점점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형편상 대학교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공부에 대한 의욕도 상실했고 집에 오면 공부할 분위기가 안 돼서 친구 집에서 시험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인문계인 인일여고를 포기하고 실업계 여고로 진학하여 졸업을 했고 동생은 고3 때 다리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어머니한테 드렸고 어머니는 알뜰하게 관리를 잘 하셔서 땅을 사고 몇 년 후 상가주택을 지어서 이사를 하고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 어머니가 어려운 환경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작은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방송대에서 늦깎이 대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치 당신 때문에 딸이 뒤늦게 고생한다시며 김치를 담아주시고 출석수업이 있는 날에는 사위가 불편할까봐 손수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저는 내친 김에 <국문학과>와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문학과>에서 공부를 하는데 늦게 배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만일 제가 전에 일반대학교를 나왔다면 지금처럼 공부하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겁니다.
어머니 저한테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충분히 부모의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저는 지금의 삶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부디 건강하시고 손자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을 때까지 오래 사셔야죠?
2007년 11월 15일
맏딸 정숙 올림.
1998년 친정아버지 칠순잔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