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올케 ♥
올케란 혈연지간인 ‘오빠나 남동생의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다.
예전부터 시누이와 올케 사이를 마치 견원지간(犬猿之間 : 개와 원숭이)처럼 사이가 무척 나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래서 시집살이가 심한 경우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라고 했다.
흔히 시누이는 시어머니와 가깝기 때문에 며느리 입장에서는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딸 입장에서는 올케 보다는 친정어머니 편을 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가난한 8남매의 장남인 아버지와 중매로 결혼하셨다. 당시 4남4녀였기 때문에 큰고모가 어머니와 한 살 밖에 나지 않았고 그 아래로 시누이와 시동생이 줄지어 있었다.
어머니는 결혼하자마자 시어머니(나의 할머니)가 막내 시동생(막내 삼촌)을 낳으셔서 새색시가 어린 시동생을 업어키우고 시집살이가 너무 고되어서 그런지 3년동안 아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태어났고 9년 동안 모진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내 바로 아래는 유산(流産)을 하기도 했다.
나는 자라면서 어머니한테서 엄한 시집살이 하신 얘기를 수 없이 들었다. 할머니는 딸인 나의 큰고모가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도 집안일을 전혀 시키지 않으셨고 오로지 며느리인 어머니한테만 하루종일 집과 밭에서 일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큰고모는 올케인 친정어머니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간 옷을 입고 허락도 없이 입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사남매 중 맏딸인데 동생들한테는 자상한 언니의 모습 보다는 엄한 맏이로서 행동했기 때문에 동생들한테서는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나는 동생들이 공부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내 방식대로 따라주기를 바랐다. 나는 공부를 가르치다가 틀리면 선생님 보다 더 무섭게 야단을 치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동생들을 너무 잡는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는 내 아이들한테도 같은 방식으로 공부를 가르쳤지만 내가 부모라서 그런지 잘 따라주어서 기초를 잘 잡아주었더니 학교에서도 공부 잘 하고 반듯한 학생으로 평가를 받았다.
큰남동생은 고지식한 내 성격이 행여라도 아내한테 깐깐한 시누이 노릇을 할까봐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큰올케와 마찰을 일으킨 적이 없다. 나 역시 다른 집안의 며느리로서 똑같은 며느리 입장을 공감하고 있어서 경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큰동생이 29살 젊은 나이에 경험도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가 십 여년 만에 家産을 탕진하여 작은 동생 집까지 날리게 되자 이혼을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두 조카와 함께 살고 있다. 큰동생은 지금도 별로 하는 일 없이 큰올케가 식당에서 일하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다.
올케도 한 때는 부잣집 맏며느리로서 호사를 누리고 살았지만 현재는 고생이 많다. 나 보다 다섯살이 적은데도 같은 오십대로 보일 만큼 고생이 많다.
지난 일요일에 친정에서 김장을 했는데 큰올케는 나 보다 더 먼저 도착하여 일을 하고 있었다. 김장이 끝나고 내집 김치는 택시를 타고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올케가 승용차로 태워다 주는 바람에 편하게 왔다.
올케는 오후에 식당에 출근해야 하는데도 내집에 다녀간 것이다. 나는 내가 사서 몇 번 입지 않았던 반코트와 조카 유라한테 주라고 기장이 짧은 패션 점퍼를 싸서 주었다.
내가 “올케도 방송대학교를 다니면서 컴퓨터도 익히면 나처럼 편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텐데.”하니까 “저는 사회복지원에서 간병인 자격증을 이미 취득했어요. 형님! 그리고 저는 식당에서도 카운터를 보니까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하면서 애써 미소를 짓는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남편의 사업빚 때문에 도와줄 수 없는 형편임을 올케도 잘 알고 있다. 남동생이 지존심을 버리고 노동을 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하여 빨리 재기해야 할텐데 혼자 애쓰는 큰올케가 너무 안쓰럽다.
友瑛. 2007. December.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