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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

부모님 전상서


 

                ♥ 부모님 전상서 ♥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주말드라마가 있는데 바로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김수현씨가 지은 드라마로 제목이 [부모님 전상서]이다. 이 드라마에는 두 명의 아들을 결혼시키고도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고부간과 동서지간에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살아가는 이야기와 출가한 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정확하게 그려낸 작가의 혜안(慧眼)에 그만 감탄사(感歎詞)가 절로 나온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나의 부모님은 올해 아버지가 77세이시고 어머니가 75세다. 아버지는 충청북도 괴산의 가난한 농가의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만주로 가셔서 자동차 정비와 운전기술을 배우셨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 입대를 하셔서 운전병으로 복무를 하셨고 제대 후에는 트럭, 화물차, 시청 청소차, 합승, 버스 등 퇴직하실 때까지 운전만 하셨다. 어머니는 일찍이 외할아버지를 여의고 삯바느질을 하는 외할머니를 도와 맏딸로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의 뒷바라지를 받은 작은 외삼촌은 경찰에 투신하였는데 후에 총경계급으로 ‘경기도경찰국 정보과장’까지 오르셨다가 정년퇴직을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인천으로 올라오셨는데 시골에 조금 남아있는 농토를 바로 아래 동생(큰삼촌)한테 맡기면서 할머니와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고 했지만 큰삼촌은 땅을 팔아서 장사를 하다가 날려버리고 할머니와 막내삼촌이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때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단칸방에서 대식구가 살아가려니까 집안은 늘 시끄러웠다. 어머니는 빚을 얻어서 전세금을 마련하였고 할머니와 삼촌이 대전으로 가셨다. 그 후로도 할머니가 인천에 자주 올라오셔서 돈을 가져갔기 때문에 그 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셨고 빚을 갚느라 애를 쓰셨다. 막내삼촌은 어머니가 시집을 가신 다음에 할머니가 늦둥이로 낳으셔서 어머니가 업어 키우셨다고 하는데 나하고는 3살밖에 나이차가 나지 않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저학년 동생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양철로 된 함지박 뒷면에 학교에서 주워온 몽당 분필로 산수 문제를 설명해 주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서는 과외지도 한번 받지 않고 책과 참고서만으로 당시에 명문으로 알려진 여자중학교에 당당하게 합격을 하였다. 막내삼촌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오셔서 “돈도 없는데 공장에 내보내서 돈을 벌어오게 하지 계집애를 왜 중학교에 보내느냐? 차라리 막내를 데려다가 중학교에 보내라.”고 호통을 치셨다. 당시 우리 집은 부처산 산꼭대기에 살고 있었는데 나하고 같이 졸업한 초등학교 동창생 12명 중에서 단 두 명만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것도 명문학교는 나 혼자여서 동네 사람들은 “얘는 이 다음에 학교 선생님이 되어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될거야.”하면서 칭찬을 했다. 결국 아버지는 할머니의 뜻을 거역하고 둘을 공부시킬 형편이 안되니까 막내삼촌을 공부시키지 않고 나한테만 공부의 혜택을 받게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역할도 컸다. 담임선생님이 부모님을 학교로 오시게 해서 어머니가 학교에 다녀오셨는데 선생님은 “요즘 세상에는 여자도 배워야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시집을 잘 갈 수가 있어요.”하셨다고 한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배우고 싶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한 한(恨)이 있으셔서 나한테 기대를 많이 하셨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육대학교]는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등록금을 제 때에 맞춰 낼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막내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소아마비(小兒痲痺)로 판명됐다. 부모님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아버지는 폭음을 하셨고 어머니는 항상 울면서 지내셨다. 이처럼 우울한 집안 분위기는 나한테 공부할 기회를 방해했고 나는 인문계여고가 아닌 여상으로 진학하여 졸업 후 맏딸로서 살림밑천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내가 벌어들인 수입으로 알뜰하게 재테크를 하셔서 땅을 샀는데 마침 개발 붐이 일어나서 땅값이 열 배 이상 뛰었다. 여동생도 여상을 졸업하여 취직을 하였고 아버지와 두 딸이 벌어들인 돈으로 그 땅에 상가주택을 짓고 임대를 하여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큰 남동생이 전문대를 졸업하자마자 사업을 하겠다고 하여 사업자금을 대주었는데 계속 실패를 거듭하여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게 되자 막내 남동생은 이혼을 하였고 이제는 25평형 전세방에서 막내 동생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쓸쓸하게 살고 계신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쓰리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곱상한 외모로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어머니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지금은 당뇨와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시고 있고 어머니도 허리가 좋지 않아서 오래 걸으면 힘들다고 하신다. 이 사진은 작년 아버지 생신날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드렸는데 예전의 곱상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내 눈에는 같은 연배의 다른 어르신들 보다는 미남(美男)으로 보인다. 나는 아직 두 아들이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편하게 모시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나는 끼니도 제대로 이어가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오늘도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友瑛                      2005. May.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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