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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사시험

 

 

         ♠ 국사시험(國史試驗) ♠        


 '國史'는 한 나라의 歷史를 말하는 것으로써 ‘과거의 변천(變遷)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기록’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韓國史’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5000년 동안 다른 나라로부터 수없이 침입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잘 버텨왔다. '國史'는 가정으로 말한다면 족보(族譜)와 같아서 국사를 모르면 마치 사람이 자기 조상의 뿌리를 모르는 것과 같다. 한 나라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국어와 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입시교육이 강조되어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생의 4분의 1만이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고등학교>에서 ‘국사’와 ‘세계사’가 ‘지리’, ‘일반사회’와 함께 [사회과목]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나 <중학교> 과정과 <고1>과정에서는 ‘국사’만은 별도의 교과서로 되어있다. 이는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학계’와 학습부담을 줄이고 종합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는 ‘교육학계’의 주장을 절충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일본의 우익계열 출판사인 [후소샤]가 일본 정부에 제출한 교과서 검정 신청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행하여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요청에 의한 것처럼 기술하고 식민지통치(植民地統治)를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 얼마 전에는 일본의 ‘시마네(島根’)현에서 주민들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국사'는 각 대학교에서 교양과목(敎養科目)으로 채택되어 가르치고 있고 내가 재학 중인 <방송대학교>에서도 [韓國史의 理解]라는 교과목으로 배우고 있다.

 韓國史는 크게 원시고대사회, 중세사회, 근대사회, 현대사회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1. 원시사회(原始社會)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그 자리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라는 4군을 설치하고 군 밑에 현을 두고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한군현의 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은 토착세력들의 결합과 정치력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한의 세력을 몰아내고 고구려, 옥저, 동예, 진국 등 초기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처음 압록강의 한 줄기인  동가강 유역에서 자리잡았다. 고구려의 건국에는 건국신화인 주몽설화에는 지배층간의 대립과 분열의 모습이 담겨있다. 고구려는 을파소를 재상으로 등용하고 빈민구제책인 [진대법]을 시행하였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지배층과 백성사이에 사상적 통일을 꾀하고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키웠다. 그리고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왕 때에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2) 백제(百濟)

<백제>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내려와서 미추홀(인천)과 위례(서울)에 자리를 잡았다가  뒤에 비류가 온조에 합류하였다.


3) 신라(新羅)

 <신라>는 진한 12개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되었다. 신라의 왕위는 朴, 石, 金의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차지하였다. 독특한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지배층의 권위를 보장하였고, 국가의 중대한 일은 화백(和白)에서 결정하였다.[화백제도]

 [내물왕] 때는 倭王의 요청으로 셋째아들을, [눌지왕] 때는 고구려장수의 요청으로 동생을 인질로 보내야만 했다. 이들은 몇십 년 후 박제상의 지혜와 용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 6세기 초 [지중왕] 때에는 나라이름을 신라(新羅)로 정하고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왕의 칭호도 중국식의 ‘王’으로 바꾸었다. [법흥왕]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적인 종교사상으로 받아들였다.[진흥왕]때에는 활발한 정복사업을 펼쳤고 정복한 지역에는 순수비를 세워 위세를 과시하였다. 또한 15~16살 나이의  귀족자제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뽑아서 화랑이라 하였다.


 삼국의 신분제도는 지배층의 권력과 지위와 부(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다. <고구려>는 벽화에 그려져 있는 인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신분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다. <백제>는 관등체계에 따라 옷 색깔로 구분하였다. <신라>의 골품제는 17관등으로 이루어진 체계에서 진골만이 최고관등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삼국은 나라의 제도와 법을 갖추어 발전하면서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불교와 도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는데 인과(因果)의 논리로 설명해낸 사상이자 종교였는데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백제>는 침류왕 원년에,<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이차돈의 순교(殉敎)를 계기로 공인되었다.

 삼국에서는 漢字의 음이나 뜻을 따서 우리말을 나타내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설총은 이두(吏讀)를 만들고 이두로써 향가(鄕歌)를 기록하였다.


2. 중세사회(中世社會)

 중세사회는 통일신라시대부터 1862년의 농민항쟁까지를 다루고 있다.

1) 통일신라(統一新羅)

 삼국이 정립한 뒤 삼국 간에는 서로 영토를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신라의 삼국통합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통일신라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서 당을 몰아내는 전쟁을 통하여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고구려의 옛 땅에는 고구려 장군이었던 대조영에 의해 698년에 발해가 세워졌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할 때까지 통일신라와 비슷한 기간 도안 존속하면서 서로 경쟁을 하였는데 ‘해동성국’이라고 불렸다. 신라는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재정비하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배층은 그것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하면서 백성을 다스렸고 불교가 전래되어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2) 고려(高麗)

 송악 지방의 호족출신인 고려의 태조 왕건은 농민봉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수취체제(收取體制)를 정비하고 노비로 전락한 양인들을 본래의 신분으로 되돌려 민심을 수습하였고 북쪽으로 눈을 돌려서 영토를 넓히고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고려는 북진정책을 내세워 거란과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펼치고 송나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왕건은 호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28명의나 되는 호족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로써 문벌귀족이 생겨났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은 최승로가 주장한 ‘시무28조’를 수용하여 유교를 정치적으로 이념화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경제제도를 정비하여 지위에 따라 전토(식량)와 시지(땔나무)의 수조권을 분급받는 전시과(田柴科)와 수확물의 4분의1을 수취할 수 있는 수조권을 두었다. 신분제도(身分制度)로는 지배층(支配層)인 양반과 피지배층(被支配層)인 양인, 천민, 노비가 있었다. 12세기부터는 지배계급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고 몽고의 침입으로 노비, 농민, 천민, 삼별초 등이 맹활약을 하였다.


3) 조선(朝鮮)

 태조 이성계는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였다. 조선을 세운 주도세력은 조선국가의 여러 제도를 수립하고 이를 [경국대전]이란 법전을 편찬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삼남지역의 발전된 농업을 농사기술에 정통한 노인들로부터 수집하여 [농사직설]을 만들었다. 신분제도로써 지배계급인 양반과 중인, 피지배계급인 평민과 천인(賤人)으로 나뉘었다. 평민은 상민 또는 양인 이라고 부르는데 학교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벼슬길에도 나갈 수 없었지만 공민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었다. 천인은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존재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천민 가운데서 특히 노비(奴婢)는 매매(賣買)와 상속(相續)이 되는 물건과 일을 하는 도구로 취급되었다. 노비 외에도 천인에 속하는 존재로는 백(白丁), 광대(廣大), 사당(祠堂), 무격(巫覡), 창기(娼妓), 악공(樂工) 등 천시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조선 건국세력의 주축이 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계층은 성리학(性理學)에서 자신들의 정치이념과 세계관을 대변하는 사상을 발전하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유교연구와 학술사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지배계급에게는 [유교경전]을 가르치고 일반인에게는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이두문자(吏讀文字)를 사용했다. 1441년 세종 23년에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훈민정음]이 만들어졌지만 양반들은 한문을 사용했고 한글은 상놈이나 여자들이 쓰는 언문(諺文)이라고 멸시하였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이 확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훈척세력과 사림파가 대립하면서 사화(史禍)가 거듭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농업, 수공업, 광업 분야에서 생산이 발전하여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특히 수공업과 광업에서 돈 있는 사람이 작업장을 차려놓고 사람을 고용하여 물건을 파는 임노동관계가 나타났다. 정치에 있어서는 붕당 간에 당쟁이 격화되었으며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조선정부는 엄격한 신분제에 따라 조세(租稅)를 차등(差等) 부과하여 재정을 유지하였는데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봉건지배층의 사치욕구가 더욱 커졌고 국가재정의 지출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農民戰爭)과 1862년 삼남을 중심으로 한 농민항쟁(農民抗爭)으로 터져 나왔다.


3. 근대사회(近代社會)

 근대사회는 구한말 개항(開港)에서부터 해방 이전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까지를 다루고 있다. 19세기 후반 세계열강들이 곳곳에서 식민지 쟁탈을 벌이고 있었는데 드디어 아시아의 극동에까지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은 외세의 침략위기를 극복하고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해야 했는데 이러한 흐름은 척사운동, 개화운동, 농민항쟁 등으로 나타났다.

 

 ‘척사운동(斥邪運動)’은 전통적인 봉건체재를 유지하면서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반침략적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개화운동(開化運動)’은 개항을 불가피한 시대적 흐름으로 알고 봉건체제를 개혁하려고 한 사회개혁운동으로 갑신개혁(1884), 갑오개혁(1894)으로 이어졌으며 그 후 광무개혁 독립협회운동과 문화계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주로 양반 관료층에 속하는 신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위로부터의 근대화운동이었다. ‘반봉건 농민항쟁’은 1894년 농민항쟁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 후 영학당운동, 활빈당운동, 한말 의병전쟁으로 계승되었는데 농민층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사회변혁운동이자 민족중심의 반침략민족운동이었다.

 

 1894년 농민전쟁이 좌절된 뒤 제국주의열강들이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등을 둘러싼 구미열강과 일본의 경제이권 침탈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의 기반을 무너뜨렸고 개화정책의 불만을 품고 있던 봉건유생들은 의병봉기를 통해서 난국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조선의 주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었다. 이런 가운데 신지식층, 개명유학자, 개명관료 등 계몽운동가들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계몽운동을 벌여나갔다. 1910년대는 일제가 총칼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와 경제수탈은 1919년 3.운동으로 폭발하였다. 3.1운동은 반일민족독립을 지향한 부르주아민족운동의 절정을 이루었지만 민족대표의 소극적 대응과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철폐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하였다. 문화정치는 조선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중을 교모하게 억압하고 수탈하려는 기만적인지배정책이었다. 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애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만주에서는 항일 독립군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1925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어 사회주의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중국과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고 조선의용군과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조직되었다.


4. 현대사회(現代社會)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났지만 연합군의 승리로 주어진 불안한 해방이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삼상회의의 결정이 발표되자 정치세력은 좌우로 나뉘어 서로 대립양상을 띠었다. 1948년에 민족분단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제주도에서는 4.3봉기가 일어났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여 민족의 분단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민족은 반쪽으로 갈라져버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막대한 인명피해와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정권이 집권하여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대세력을 탄압하였는데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4월 혁명 (4.19의거)으로 발전하였다.


  1960~1970년대 한국사회는 군부독재와 유신체제, 경제개발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였다.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사회민주화의 열기를 누르고 강압적인 통치체제를 세웠다. 또한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정책으로 눈부신 성장과 빈부격차를 가져왔다. 산업화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정치적 자각과 사회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차츰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1980년대에 전두환정권이 새로 집권하였고, 1980년~1990년대를 통해 한국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하여 그 결과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맞이하였고 1996년에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였다. 1987년에는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제5공화국의 독재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격변을 거치면서 1993년에는 순수한 민주정권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다.

 

 할인점업체인 [롯데마트]에서는 직원들을 상대로 국사시험(國史試驗)을 치른 뒤 이를 인사평가에 반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할인점과 상관없어 보이는 ‘국사시험’을 인사평가에 반영하기로 한 것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애국심은 물론 애사심도 생긴다.”는 이철우 사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다. 시험은 1차 (古代~近代)와 2차 (근대 이후)로 나누어 매년 2차례 치러지며, 직원들은 각각 60점 이상 받아야 통과할 수 있다.

 

 [國史]가 수능시험에서 필수과목(必須科目)이 되어야만 國史를 공부하고 이를 통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출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고위 공무원 채용을 위한 각종 고시(考試)에서도 國史를 필수과목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국사교육발전위원회]에서는 역사(歷史)를 전공한 사람이 역사과목을 담당하도록 교사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초등학교]에서부터 국사교육을 제대로 가르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友瑛              2005. May.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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