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터닝 포인트 ♣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사전적 어원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분기점을 나타내는 말인데, 요즘은 인생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나는 전쟁 직후인 1955년 정월에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지역이지만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농군의 자식인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해방 전에 만주에 가셔서 운전과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셨는데 해방 후 돌아오셔서 트럭운전사로 일하셨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에 군 입대를 하시고 운전병으로 복무하셨다. 아버지는 제대 후 외가가 있는 인천에서 택시운전을 하셨다.
나는 음력으로 정월 생이라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의 학창시절은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당시 학교에서는 빈부차가 심해서 부잣집 아이들은 가정부를 고용하고, 과외지도를 받았다.
나는 가난한 삶을 물려받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부모님도 같은 생각으로 지원해주셨다.
나는 기본서인 전과와 모범수련장, 표준수련장, 동아수련장, 아카데미문제집 등을 여러 권을 사서 공부했고,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우등상을 받으면서 학급에서 분단장을 맡았다.
나는 1967년 당시 입학시험을 통해서 경기도에서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 인천여자중학교 >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이었고 9월에는 나하고 띠동갑인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백일이 지나고 소아마비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교대를 가고 선생님이 되라고 격려해주셨지만, 부모님은 막내아들한테 신경을 쓰시느라 나한테는 관심조차 없으셨다.
나는 가정형편 때문에 인일여고가 아닌 실업계로 진학했고, 졸업 후 경리사원으로 근무하면서 가정경제에 이바지했다.
결혼 후 두 아들을 낳고 정성을 쏟으면서 대리만족을 얻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배움에의 공허감이 남아있었다.
1994년 막내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학원에서 늦게 귀가하면서 나한테도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나는 <방송대학교 >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나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열린 것이다.
< 방송대학교 >를 다니면서 리포트를 쓰기 위해 배운 컴퓨터 능력으로 직장생활에서 경리업무를 활용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국문학과-법학과- 중문학과-일본학과를 졸업하고 아직까지 직장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 < 방송대학교 인천지역대학 > 로비에서 일본학과 동갑내기 S를 만났다.
로비에서 S를 기다리면서 마침 출석시험일을 맞아 후배들이 시험을 치르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방송대학교는 다양한 연령의 학우들이 공부하고 있다.
S가 도착하고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S하고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2년 반 만에 만났는데,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서 그동안 지낸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 방송대학교 >를 통해서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교류하고 있다.
그 친구들의 공통점은 졸업 후에도 늘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고 성취감이 강하다.
친구들을 통해서 나 역시 늘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友瑛. 2017. November.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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