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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

외삼촌과 외숙모

 

                                   ♥ 외삼촌과 외숙모

 

外家는 친정어머니의 친정(親庭)을 말하고 外三寸은 어머니의 남자형제를 가리키는데 가족법상 나하고는 3촌관계가 성립된다.

 

2011년 915일 오후에 친정 남동생으로부터 올해 83세인 작은외삼촌이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할머니와 큰외삼촌이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작은외삼촌도 간암으로 고생하셨다.

지난 2010년 5월 친정아버지의 빈소에 들렀을 때는 비교적 건강해 보였는데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충청북도 태생인 어머니는 사남매의 맏딸로서 위로 오라버니(나의 외삼촌)가 두 분 계시고 아래로 여동생(나의 이모)이 있다.

어머니는 어려서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와 살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방직공장에 다녔다고 한다. 큰외삼촌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기술을 배우셨고, 작은외삼촌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집안일을 도우면서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를 마치고 경찰에 지원하셨다. 어머니는 작은외삼촌이 오전에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공부를 하다 해가 어둑해서야 나무를 지고 집에 오셨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와 큰외삼촌, 외할머니, 이모는 집에 있던 작은외삼촌의 경찰복을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고 피난을 갔다고 한다. 경찰인 작은외삼촌이 수도권으로 착출되었고 비상근무로 집에 오지 못하고 당직을 섰는데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깊은 잠에 취해있었다고 한다.

북한군이 파출소에 들이닥쳤는데 외삼촌을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때려도 모르고 잠에 취해있으니까 죽은 줄 알고 가버렸다. 외삼촌이 깨어보니까 몇몇 동료 경찰들이 죽었는데 외삼촌은 다쳐서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는 외삼촌이 그때 천행(天幸)으로 살아나셨다고 한다.

 

9.15 인천상륙작전과 9.28수복으로 북한군이 밀려가자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항아리 뚜껑을 열고 경찰복을 꺼내어보니 항아리가 깨어지고 장맛비에 물이 들어가서 옷이 다 상해버렸을 때 너무 속이 상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고향에 북한군이 들어왔을 때 젊은 여자들을 잡아가서 강간하고 북으로 올라갈 때 트럭에 함께 태우고 갔다고 한다. 만일 어머니가 피난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북한군한테 끌려가서 능욕을 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 들었던 얘기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들은 작은외삼촌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타입으로 성실한 삶 자체였다.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오로지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전념하셨다.

전쟁이 끝난 후 강화도 섬에서 근무할 때 경기도 경찰청에서 높은 분이 시찰을 나 오셨다. 요즘에는 영상자료를 비추면서 브리핑을 하지만 당시는 커다란 현황판에 글씨를 써서 파출소장이 브리핑을 하는 것이었다.

브리핑은 요점을 간추려서 설명이나 보고를 하는 형식이다. 외삼촌은 바로 차트에 글씨를 쓴 사람인데 글씨체가 너무 단정해서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경찰간부가 외삼촌한테 이 차트를 김순경이 만들었어요?”라고 물었고 얼마 후 파주로 발령났다고 한다.

 

 

외삼촌은 결혼 후에도 출근 전에 새벽마다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영어회화를 익혔고 야간대학교를 졸업하셨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외가에 가면 서재에서 외삼촌이 파주경찰서로 박정희대통령이 시찰을 나왔을 때 군복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대통령과 외삼촌이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하시는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외삼촌은 클래식에 관심이 많으셔서 바이올린을 배우셨는데 나와 동갑인 외사촌이 결혼식 전날 함을 받을 때 사위 친구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다.

 

외삼촌은 총경까지 진급하셨는데 인천D경찰서장과 경기도 경찰국OO과장으로 재직하시고 정년퇴직하셨다.

친정아버지 보다 한 살 위인 외삼촌을 아버지는 늘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비록 가난하지만 성공한 오라버니가 있어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외삼촌은 중매로 외숙모와 결혼하셨는데 젊어서부터 요즘 44사이즈의 가냘픈 몸으로 4남매를 낳으셨다. 내가 어려서 안고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셨고, 학창시절 외가에 가면 반갑게 맞아주셨다.

외숙모는 외삼촌 빈소에서 바짝 마른 몸으로 외삼촌 곁을 지키고 계셨는데 아프셔서 그런지 더욱 왜소해 보였다. 나는 외숙모의 손을 잡고 외숙모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죠.”했더니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외숙모님이 투병생활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한 번도 병문안을 다녀오지 못했다.

외숙모는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12개월 만인 1121일 외삼촌 곁으로 가셨다.

나는 전갈을 받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남동생 부부와 분당에 있는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영정사진은 건강하실 때 고운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올케와 사이가 돈독했던 친정어머니는 어머니 보다 몇 살 적은 올케의 죽음이 안타까운지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나도 외사촌들한테 위로의 말을 나누다 돌아왔다.

요즘 아이들은 형제가 없어서 앞으로 외가와 외삼촌이라는 개념과 용어에 생소할지 모른다.

 

다시한번 외숙모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1

 

友瑛. 2012. December. 17

 

                          생전의 외숙모님(왼쪽)과 친정어머니(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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