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 이야기

외가와 외사촌

                                                  ★  外家와 외사촌 ★


 외가는 ‘어머니의 친정’을 일컫는 말이다.

 성인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남자 쪽에서는 本家와 妻家가 생기고, 여자 쪽에서는 親庭과 媤家가 생긴다.

 친정어머니는 4남매의 맏이로 태어나셔서 8남매의 장남인 아버지와 중매로 결혼하셨다. 충청북도 괴산군 아버지의 본가에서 9년 동안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다 내가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작은 외삼촌이 살고 있는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큰외삼촌 딸 C와 작은 외삼촌 딸 H하고 동갑이다. 나는 1955년 음력으로 정월생이고, 큰외삼촌 딸은 2월생, 작은 외삼촌 딸은 5월생이다.

 우리 셋은 생김새가 다르지만 언니. 동생 하는 호칭 없이 마치 쌍둥이자매처럼 자주 어울렸다. 시누이인 친정어머니는 두 올케(외숙모님)하고 사이가 원만했다.

 작은 외삼촌댁에는 식모언니가 상주하고 있었다. 나는 방학이 되면 작은 외삼촌댁에 가서 며칠 씩 있다 오곤 했는데 김포에 사는 큰외삼촌 딸 C도 합류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난다.


 작은 외숙모님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절에 가서 며칠 씩 경찰 간부이신 외삼촌의 승진을 비는 불공을 드리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고, 겨울에는 털실로 목도리와 장갑을 떠서 보육원에 갖다 드렸는데 나도 외가에서 뜨개질을 했다.

 외삼촌은 후에 총경 계급으로 경찰서장과 경찰국 보안과장으로 근무하시다가 퇴임하셨다. 2010년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영안실에 갔을 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녹조근조훈장이 놓여 있었다.


 내가 여상을 졸업하고 운수회사에서 경리사원으로 근무하고, 다음 해 외사촌 C는 여상 졸업 후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H는 <D대학교> 국문학과에 다녔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었다.

 H가 1978년에 가장 먼저 결혼하고 나는 1980년에  C도 다음 해에 결혼했다.

각자가 결혼하면서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따로 만날 일이 없었다. 나는 결혼 후 남편이 사업을 한답시고 일을 벌였다 실패를 거듭하는 바람에 창피한 마음에 일부러 외사촌을 찾지 않았다.


 내가 사십대가 되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외가의 행사 때만 예식장과 장례식장에서 잠시 보거나 큰외삼촌 큰외숙모, 작은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까지 그냥 스치듯 했고 서로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

작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처음으로 외사촌을 만나서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아 휴대폰에 저장했다.

 세월이 흘러서 외사촌 오빠는 전에 자녀를 모두 출가시켰고 우리 셋은 어느덧 오십대 후반이 되었고 자식들이 성장하여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현재 외가에는 어머니와 작은 외숙모와 이모만 생존하시는데 70대 후반에서 80대 후반으로 고령이시다. 이제는 50대의 외사촌들이 주축이 되었다.

  1955년생 삼인방 중에서 H의 아들이  4월17일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남동생내외와 남편과 동행하여 결혼식에 참석했다.

 나는 디카를 준비해서 어머니와 이모님, 외숙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드리고, 동갑내기 외사촌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여자들은 同姓인 어머니와 가깝기 때문에 친가 보다 외가를 선호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려서 외가가 살고 있는 인천으로 올라와서 그런지 친가 친척 보다 외가 친척들이 가깝게 느껴진다.

 

    友瑛. 2011. April. 25

 

            나, 친정어머니. 이모

           나.작은 외숙모. 친정어머니

                나, 큰외삼촌 딸

           작은 외삼촌 딸과 며느리


 

 

 

 

   

 


'가족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정엄마표 김장김치  (0) 2012.12.10
어머니의 존재  (0) 2012.05.28
가족의 범위  (0) 2011.01.31
착한 부부  (0) 2010.12.20
My Car  (0) 201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