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빈자리 ♥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보름이 지나갔다.
가장 큰 슬픔이 배우자를 잃는 것이라고 한다. 친정어머니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행여 우울증에 걸리실까봐 나를 비롯한 형제들이 수시로 전화하고 찾아가 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우려와 달리 다행히도 잘 주무시고 식사도 잘 하셔서 안색이 좋아졌다.
어머니가 “처음 며칠 동안은 밤에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면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무서웠는데 차차 나아지도 있다.”고 하셔서 내가 “아버지가 엄마하고 정을 떼시려고 그랬나 보네요.”고 했다.
인천시립화장장 ‘승화원’에서 화장하여 납골당으로 모시기고 했는데 새로 짓고 있는 납골당이 완공되지 않아서 임시로 추모관에서 보관했다.
6월1일 남동생으로부터 “납골당이 완공되어 우선 유골함만 안치하고 왔는데 명패와 사진을 갖다 놓으러 가는데 함께 가세요.”하는 연락이 왔다.
마침 6월2일이 ‘2010년 지방선거’로 임시공휴일이어서 조카들도 학교에 가지 않으니까 함께 가기로 정했다. 나는 유통업체에 근무하고 있어서 아침에 출근했다 오후 1시에 퇴근했다.
남편과 수박을 사가지고 친정에 갔더니 얼마 전 군 입대를 한 큰조카를 제외한 큰 남동생과 막내남동생의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납골당에 명패와 함께 넣어둘 사진액자를 만들기 위해 앨범에서 사진을 꺼내어 고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많은 사진들 중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여러 장 골라서 미리 사온 액자에 넣었다.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는 별로 느껴보지 못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의 빈자리가 새록새록 느껴진다.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핑 돈다. 이렇게 멋진 분이셨는데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으니 더욱 따뜻하게 대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간호하다 지쳐서 아버지가 식사를 잘 하지 않으려고 하면 자상하게 대해드리지 않고 짜증을 냈다고 하시면서 아버지 영정 앞에서 “내가 잘못했어요.”하고 울먹였다고 하신다. 그래서 옛말에 “있을 때 잘 하라.”고 한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우리 부부도 배우자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여동생은 미국에 살고 있어서 어머니와는 자주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 있고, 내가 사진파일을 첨부하여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가족들이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아버지가 계신 납골당으로 향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막내남동생의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만나러간다고 친구도 만나지 않고 들떠있었다. 큰남동생이 막내한테 사업자명의를 이전했는데 사업 실패로 막내남동생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갔다. 작은올케가 이혼울 요구하여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정부모님이 사랑으로 키워준 조카들이라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지난번 영안실과 화장장에서도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무척 슬퍼했다.
아버지를 화장한 시립화장장 ‘승화원’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만월산(滿月山)을 개간하여 만든 만월당(滿月堂)이 보인다. 만월당 주위가 탁 트이고 공기가 맑고 나무가 많아서 가족들이 추모를 하고 산책할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다.
관리자를 찾아 명패와 사진 액자를 넣어달라고 했더니 사진은 한 장만 넣을 수 있다고 해서 우선 명패만 넣고 닫았다. 납골당은 이중 유리로 돼 있는데 밖에서도 유골함과 명패가 잘 보이도록 꾸며놓았다. 관리자가 자석빨판을 유리문에 붙이고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어서 열었다 닫았다하는 것이 신기했다. 납골당은 15년 계약으로 1년에 15만원의 관리비를 내면 되는데 무척 저렴하다. 남동생이 사진 액자를 다시 만들어 갖다 놓는 다고 했다.
남편이 주변을 산책하자고 해서 돌아보았는데 납골당 위로 양지 바른 곳에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3대까지 유골함을 안치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버지도 가족묘로 옮겨드리려고 한다.
가족이 한 줄로 서서 아버지께 잘 다녀간다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다.
友瑛 . 2010. June. 5
2004년 부모님
2007년 부모님
2008년 이버지 팔순 생신
만월당에서 어머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