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동생 ♥
나는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은 58년 개띠 생인데 어려서는 성격이 서로 반대여서 별로 다정다감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가난한 집안의 4남매의 맏딸로 학교에서 돌이오자 마자 집안일을 돕고 어머니를 도와 식사준비를 했지만, 여동생은 책가방을 던져놓고 친구들과 놀다 해가 어두워져야만 집에 돌아왔다. 설거지는 물론 방청소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한테 “00는 왜 일하는 것을 싫어해요?”라고 물으면 “엄마가 있고 언니가 있는데 00이까지 일할 필요가 있니? 언니노릇 좀 그만 해라.”하시며 면박을 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8남매의 장남이신 아버지를 만나 힘든 시집살이를 겪으셨기에 장남을 기피하여 월세를 얻어 결혼했는데, 결혼 후 남편이 경제력이 없어서 친정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여동생은 “나는 언니처럼 초라하게 살지 않을거야.”하면서 친정살이하는 나를 은근히 무시했고, 집안에서 설거지 한번 하지 않고 몸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장남인 제부한테 시집을 가서 호된 시집살이를 하였다. 여동생은 자신이 윗사람의 처지가 되어 철없는 아랫동서를 거느리고 보니 내 입장을 이해했는지 전 보다 다정다감하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여동생과의 사이는 원만하게 되었다. 여동생이 1995년에 괌으로 이사를 갔다가 지금은 미국 워싱턴에서 살고 있다.
나는 컴퓨터를 배워서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여동생은 아직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국제전화를 자주 이용하고 있다.
여동생은 큰 남동생이 사업을 한다고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분가해서 살고 있고, 이혼하고 홀로된 작은 아들과 손자를 보살피면서 함께 살고 있는 친정 부모님의 근황과 건강상태 등을 나한테 자세하게 물어온다.
부모님은 여동생이 걱정할까봐 몸이 아프셔도 “건강하다.”고 하셨고, 나한테도 “00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마라.”고 하셨지만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9월 초에는 81세이신 친정아버지께서 관절이 많이 좋지 않으셔서 큰올케가 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대학병원에 가서 MRI 검사 결과 알리선수와 같은 파킨스씨병으로 알려졌다.
어머니가 보름동안 아버지 곁에서 간병하셨고 남동생이 경제력이 없어서 병원비를 내가 치렀다. 여동생이 올 봄에 돈을 보내서 맞춘 아버지의 틀니를 병원에서 잃어버려서 틀니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여동생이 그 사실을 알고 돈을 다시 보내왔다.
아버지는 재활치료를 해야 하는데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친정에서 계신다. 요즘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곁에서 부축해서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 건강까지 나빠졌다.
어려서 애지중지하던 두 아들은 경제력을 핑계로 병원비는 물론 일체 무관심하고 나와 여동생만 부모님의 건강문제로 늘 걱정뿐이다.
내가 아직까지는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까 병원비를 신용카드로 분납하여 치를 수는 있지만 남편이 살아있고 두 아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빈 방이 없다.
나는 올케한테 “정기적으로 병원에 갈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와 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올케가 “그건 할 수 있어요.”한다.
자기네는 경제력이 없으니 오로지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것만 하겠다는 것이다. 큰남동생은 능력이 없으니까 올케의 눈치만 볼 것이다.
남편한테 사실을 얘기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다. 2001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지금은 이혼한 형수한테 구박을 받을 때도 자신이 모시자고 하지 못했다.
부부사이라도 자신의 부모님을 배우자로 하여금 강요하지 못한다. 여동생 역시 미국으로 모셔가고 싶지만 제부가 있으니 돈으로만 효도할 뿐이다.
“언니밖에 없어. 언니가 자주 전화하고 자주 찾아가 뵈어. ”
여동생은 통화할 때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목이 메어 울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다.
부모님한테 효도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友瑛. 2009. October. 20
올 봄에 여동생이 나한테 보내준 스카프, 핸드백, 갱년기 홀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