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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

우울증과 자살

               

                             

                                          ♣ 憂鬱症과 自殺 ♣


 지난 10월2일 출근하여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최진실씨가 자택에서 압박붕대로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인기도 높고, 돈도 많이 벌었고, 무엇 보다  어린 두 남매가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자살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전남편 조성민씨와 이혼 후 우울증에 시달려 왔고 늘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왔다고 한다.

 사망 당시 몸무게가 31kg밖에 안 되었다고 하니 우울증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상상이 간다.


 우울증은 생물학적으로 도파민과 세로토닌 같은 뇌 신경전달물질에 이상이 생긴 증상을 말하는데 남성 보다 여성한테서 발병률이 높고 특히 중년여성한테서 많이 발생하고 있다.

 돈도 인기도 대중의 사랑도 그녀의 우울증을 잠재울 수 없었던 것 같다. 더구나 최근에는 절친한 정선희씨 남편인 안재환씨의 죽음에 그녀가 사채업자로서 관련되었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악플’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이들의 친권과 양육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신의 姓氏로 바꿀 정도로 자식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녀였다.


 경찰에서는 부검 결과 충동에 의한 자살로 단정지었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터넷상에서 근거 없는 모욕 및 악플을 처벌하기 위한 ‘최진실법’을 놓고 與野 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그녀는 1988년에 데뷔하여 CF의 여왕으로 등극하였고,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면서 세대를 초월하여 국민적 사랑을 받아왔던 국민배우였다.

 2008년 10월 4일 그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그녀의 죽음으로 생부인 전남편 조성민씨가 두 아이의 친권자와 양육권자로서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살아왔는데 엄마 없이 아버지와 살아가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서 걱정스럽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를 두고 어떻게 모진 마음을 먹을 수가 있었을까? 이제 갓 사십이 되었는데 죽기에는 너무 젊고 아깝다.


 나는 20년 전 최진실씨가 데뷔할 때부터 줄곧 지켜보았던 팬의 한 사람이다. 그녀가 집안이 어려워서 수제비만 먹고 살았다고 하여 ‘최수제비’라는 별명이 있는데 나 역시 밥 보다는 수제비를 많이 먹고 자라서 연민을 느꼈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서 최진실씨의 죽음에서 발인까지 지켜보면서 다른 여배우의 죽음 때와 달리 내 마음도 착잡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도 한 때 아이들을 두고 죽으려고 했다가 자살미수에 그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과 2년간의 연애기간을 거쳐서 임신한 상태로 1980년 5월4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남편은 연애 때와는 달리 자상하지도 않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이었다. 연애할 때는 결혼 준비가 다 됐다고 했는데 내가 임신이 되어 친정에서 결혼을 서두르자 돈이 없다고 하여 어머니가 당시 이백 만원을 주셔서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후 석 달 만에 사글세로 얻은 방세가 밀려서 주인이 방을 내놓으라고 해서 친정으로 들어와서 살았는데 큰아이가 태어나자 화장품대리점을 하겠다고 직장을 그만두어서 친정부모님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친정아버님이 화장품대리점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둘째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유람선을 사서 운영하겠다고 덜컥 일을 벌였다가 반년 만에 손해를 보고 정리하였고, 전자대리점의 수금사원으로 들어가서 나 모르게 시댁에 돈을 보태주느라 공금을 유용하는 바람에 월급으로 적금을 들었던 것을 해약하여 갚고도 모자랐다. 나는 어린두 아이를 친정에 맡겨두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가 큰아이가 폐렴이 걸려서 그만두고 병구완을 했다.

 당시 친정에서는 3층짜리 상가를 두 동이나 가지고 있어서 임대수입만으로도 부유하게 살았다. 내가 시댁에 가면 큰동서를 비롯한 시댁식구들이 아들(남편)이 장가를 들더니 부모한테 소홀하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어느날 큰동서는 나한테 “삼촌이 결혼하면 자신이 어머니를 모시고, 사별하고 홀로된 누나(시누이)의 조카들을 아버지를 대신해서 대학교까지 보내겠다고 했다.”고 했다. 나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집안에 우환이 있다 보니 자연히 부부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남편은 밖으로 돌다가 늦게 들어와서 잠만 자고 다시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나는 결혼 초기부터 우울증세로 늘 머리가 아파서 두통약을 상비약처럼 갖춰놓고 살았다. 어느날 남편의 친구부인이 이상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하고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절친한 동창인 K와 사귄다는 것이었다. 나는 K와 통화하여 사실 확인을 하였고 그녀는 “단지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당시에 K는 미혼이었는데 결혼 전부터 나를 통해서 남편과는 서로 알던 사이였다.


 친정어머니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아이들을 남편한테 주고 이혼하라고 하셨고 나는 아이들을 줄 수 없다고 갈등을 겪었다. 요즘 같으면 이혼해도 엄마가 자녀를 양육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내가 경제력이 없고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1986년 어느 날 어머니가 “너처럼 남편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이혼도 못하는 병신으로 살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셔서 목욕탕에 들어가서 실컷 울다가 우발적으로 표백제를 먹고 비틀거리다가 어머니한테 발견되었다. 남동생이 택시를 불러서 집에서 가까운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위세척을 했다. 남자간호사가 팔다리를 침대에 묶어놓고 목을 고정시켜놓고 호스를 집어넣어 이물질을 뽑아냈는데 고무통으로 거품이 넘쳤다. 나는 입원실로 옮겨서도 다른 환자들한테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회진을 나온 여의사가 “어린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렀어요.?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보세요.”하는 말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시 두 아이가 최진실씨의 아이들과 같은 7살과 5살이었다.

 남편은 나의 갑작스러운 돌출행동에 충격을 받아 K와의 관계를 정리하였고, 나는 3년 후 다른 친구를 통해서 K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작은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한 1994년에 [방송대학교]에서 늦깎이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무조건 돈을 아끼느라 화장이나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 후로는 나 자신을 위해 투자를 하고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쓰면서 살고 있다.


 남편은 이후에도 여러 번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경제적인 고통을 가져왔고, 마지막으로 형님과 동업하다가 IMF때 부채를 혼자 떠안고 그 빚을 지금까지 갚아나가고 있다. 남편은 이기적인 형님과 달리 허세가 강하지만 인정이 많고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실용음악’을 전공한 큰아들이 29살이고, 작은아들이 명문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는 데 내년에 4학년만 마치면 졸업한다.

  내가 만일 그때 죽었다면 두 아들이 지금처럼 안정된 삶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비운의 배우 최진실씨의 죽음을 보면서 잠시 예전 일을 생각해 보았다.


최진실씨는 우울증이 없는 좋은 곳에서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 아이들도 좋은 환경 속에서 잘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友瑛. 2008. Octobe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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