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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 Report

[文化史]교양과목

 

<< 볼테르의 『캉디드』에 나타난 18세기 프랑스적인 요소를 추출하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정리하고 그 성격에 대하여 규명해 보라. >>




                       ★  차  례  ★





1. 서언(緖言)


2. 볼테르(Voltaire)와 계몽사상(啓蒙思想)

[1]볼테르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2]18세기의 프랑스의 계몽사상


3.『캉디드』에 나타난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不條理)와 아이러니(Irony)


4. 결어(結語)


5. 참고문헌(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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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緖言)

 

 계몽주의(Enlightment)는 18세기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사상계를 휩쓸었던 사상으로 철학이론을 보다 쉽게 풀이하여 일반 민중을 교화하고 인문을 개발하려던 사상이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영국의 철학자 존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정치철학이 프로테스탄트의 프랑스어 번역에 의해 보급되면서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볼테르, 몽테스키외, ‘백과사전파’ 등의 계몽사상가들이 등장했다. 칸트는 1784년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용기를 내어 알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18세기 계몽주의와 결부되어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봉건적인 군주제에 대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눈부시게 발전하여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1760년대 말까지 유럽을 정복하였다.

 지금부터는 볼테르가 1759년에 발표한『캉디드』에서 나타난 18세기 프랑스적인 요소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2. 볼테르(Voltaire)와 계몽사상

 

[1]볼테르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필명으로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cois-Marie Arouet)였다. 파리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회 소속의 루이 르그랑대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졸업 후에는 사교계에 드나들며 당대의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교류를 갖고 자유분방함과 풍자정신을 배우게 된다. 루이 15세의 섭정을 비난하던 프랑수아는 1717년 바스티유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처음으로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비극 <에디프(Edipe)>라는 장편시를 완성했고 석방되자 문필가로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725년 한 사교장에서 볼테르는 어느 후작에게 불손한 행동으로 인하여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3년 동안은 볼테르가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W.세익스피어 작품을 직접 관람하고 그 무렵의 영국작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서사시 <일리아드(1728)>를 출판하였다. 1729년 귀국하자마자 극작 <자이르(1732)>를 발표하고 영국 견문가 입장에서 프랑스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철학서한 (영국서한)>을 간행하였다. 당국이 즉각 분서(焚書)처분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애인 뒤 샤틀레부인과 함께 부인의 저택이 있는 실레로 도피하여 십년간 머무르면서 <이 세상 이사람(1736)>, <마호메트(1741)>, <메로프(1743)>, <인간론(1738)>, <뉴턴 철학입문(1738)> 등을 집필하였다.

 애인 뒤 샤틀레부인 사후 볼테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2세의 초청으로 포츠담으로 가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 (1751)>와 ‘철학 꽁트’ <미크로메가스(1751)>를 발표했으나 프리드리히2세와의 마찰로 프로이센을 떠났다. 또 루이 15세와의 불화로 파리에 돌아갈 수 없었던 볼테르는 자작 연극의 상연을 둘러싸고 제네바당국과 압력을 일으키는 한편 1955년 11월1일에 리스본을 덮친 대지진을 다룬 시로 J.J 루소와 격렬하게 논쟁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1759년에 G.W.라이프니츠와 포프의 낙천주의를 야유한 ‘철학 꽁트’ <캉디드>를 익명으로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볼테르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볼테르의 역사 사고를 형성하는데 당시 상승하던 프랑스 부르조아지들의 현재 생활에 대한 새로운 확산의 감정이 중요시 되었다. 그는 {Essai}를 통해 모든 역사는 부르조아지의 이상에 역사적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이 저술에 성공을 거두게 하였다. 볼테르는 이성을 종교처럼 신뢰하였고 자연과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을 역사자체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최초로 사용한 ‘역사철학’이라는 용어는 신학적 역사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 것으로 원칙적으로는 반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는 역사는 ‘인간성’과 이에 대립하는 두 개의 힘들이 상호작용 함으로써 전개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성에 대립하는 힘은 기후, 정부, 종교 등의 조건으로 이루어지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볼테르는 『캉디드』에서 문화를 노동의 산물로 규정하고 물질적 복지나 부(富) 등 유용한 모든 것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역사서술의 중심으로 삼았던 ‘문화’ 혹은 ‘문명’이라는 개념을 잘 정의하지 못했으며 단지 훌륭한 생활과 많은 업적의 혼합일 뿐이었다. 볼테르가 정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정신이란 사상을 통합하고 이념을 꿰뚫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은 인간의 재능을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었고 행동과 창조로 이끄는 힘이었다. 볼테르는 알렉산더, 아우구스투스, 메디치가, 루이 14세 등 군주들의 정신에 혁명을 가져오고 정치적 사회적 변혁의 기원이 되는 것을 사상이라고 믿었다.


[2]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啓蒙思想)

 프랑스는 18세기에 계몽주의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시대는 문학사적으로나 철학사적으로 볼 때 전반기(前半期)와 후반기(後半期)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전반기는 1715년~1750년까지로 ‘신사조(新思潮)의 태동기’를 말하는데 그 움직임이 신중하고 온건하며 대표적인 작가로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가 있다. 후반기는 ‘격렬한 투쟁의 시기’를 말하는데 디드로, 루소, 달랑베르 등의 <백과전서파>로 구성된 진보적 집단이 구체제를 분화시키고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을 만들어냈다.


3. 『캉디드』에 나타난 18세기 프랑스사회의 부조리와 아이러니(Irony)

 

『캉디드』(Candide)는 프랑스 계몽시대의 자유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볼테르가 1759년에 지은 ‘철학  꽁트’로 본래의 제목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다.

주인공 캉디드의 이름은  ‘천진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스승인 팡글로스(Pangloss)는 형이상학적. 신학적우주론을 가리켰는데 라이프니츠의 ‘신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최선을 다하여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므로 피조물이 유한성이라는 뜻의 악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해도 전체로 본 세계는 최선의 것이며 악의 존재조차 신의 예정조화(豫定調和)에 공헌하는 것이다.’라는 {낙관주의 사상}에 물들어있는 인물이다.

 

 18세기 프랑스는 계급과 신분주의가 철저하게 지켜지던 군주시대였다. 캉디드는 스승인 팡글로스의 {낙관주의}를 굳게 믿고 있었지만 ‘툰더 텐 트롱크’남작 집에 머물면서 팡글로스의 강연을 듣고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작의 딸인 퀴네공드와 눈이 맞아서 병풍 뒤에서 키스를 하다가 들켜서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으며 자연의 섭리에서는 모든 것이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이루면서 얽혀있다.’고 하는 라이프니츠의 {충족이론}으로 인하여 엉덩이를 세게 차이고 성에서 내쫓겼다.

 캉디드는 성에서 쫓겨나서 정처없이 걷다가 불가리아 군대를 만나서 매를 맞고 영웅이 되었고 이후 프랑스와 불가리아가 전쟁이 일어나자 양측이 서로 충족이유를 벌이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몸을 숨겼고, 매독에 걸려서 거지로 변한 팡글로스를 만나서 퀴네공드가 불가리아 군인들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스승을 위해 재침례교도인 자크한테 부탁하여 치료를 받게 하고 자크를 따라 배에 탔다가 폭풍을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리스본’ 항구에 도착했지만 지진으로 인한 참사를 목격하게 된다. ‘리스본’에서는 도시의 파멸을 막기 위해 종교화형식을 거행하는데 캉디드와 팡글로스가 잡혀가서 팡글로스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캉디드는 구사일생으로 풀려나서 노파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이는 퀴네공드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캉디드를 발견하고 노파를 시켜 보살피게 한 것이다. 캉디드는 퀴네공드를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 이사카르와 종교재판소 판사를 죽이고 ‘카디스’에 도착하여 병사모집에서 뽑히고 보병중대의 지휘권이 주어진다. 노파 역시 예전에는 공주였지만 해적들한테 능욕을 당하고 페스트에 걸리고 엉덩이의 살을 떼이는 수모를 겪고 나서 불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캉디드는 스페인에서 카캉보라는 하인을 사서 남작과 해후했지만 퀴네공드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남작을 죽이고 인디언이 살고 있는 ‘엘도라도’로 가기위해 나룻배를 탔다가 나룻배가 암초에 부서지고 떠내려가다가 유용함과 즐거움이 충족된 곳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곳에서는 금과 에머랄드를 돌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궁에서 지내다가 무료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올 때 50마리의 양과 금은보석을 싣고 나왔지만 1백일 만에 양들이 늪에 빠지거나 굶어죽고 겨우 두 마리만 남게 된다. 두 사람이 ‘수리남’에 도착하자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손발이 잘린 노예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캉디드는 퀴네공드를 구하기 위해 카캉보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게하고 자신은‘ 베네치아’로 가기 위해서 운임을 치렀는데 배가 그냥 떠나버리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판사를 찾아갔지만 오히려 바가지만 쓰고 나와서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캉디드는 자신과 동행할 사람을 모집하여 마르탱이라는 늙은 학자를 만나게 되고, ‘보르도’에 도착하여 마차를 구입하여 ‘베네치아’로 가서 카캉보를 찾아다니다가 팡글로스에게 매독을 안겨준 파케트를 다시 만나게 되고, 호텔에서 같이 투숙했던 숙청된 왕족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자신은 그들보다 행복하다며 팡글로스의 주장이 옳다고 말한다.

 

 캉디드는 카캉보가 가지고 있던 금은보화를 빼앗기고 다시 노예로 전락해 있던 것을 다시 시들이고 퀴네공드를 찾으러 가다가 갤리선에서 노예로 일하던 퀴네공드의 오빠와 팡글로스를 만나게 되어 몸값을 치르고 해후하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사건에 대해 추론하고 결과에 대해 토론한다. 캉디드는 그들로부터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경위를 듣고 퀴네공드를 찾아나서서 결국 만났는데 너무나 추하게 변해버린 모습에 실망을 했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남작이 끝내 반대를 하자 그를 멀리 보내버리고 결혼을 한다. 캉디드가 가지고 있던 재물이 바닥나자 퀴네공드를 비롯한 노파, 팡글로스, 카캉보 등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캉디드와 마르탱, 팡글로스는 형이상학과 도덕에 대해 토론하면서 가끔씩 터키 고관과 회교재판관들이 유배를 가고 그 자리에 다른 고관들이 채워지는 것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여태껏 겪어온 고초보다 지금의 삶이 더 행복한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마르탱은 “인간은 근심 속에서 살거나 권태롭고 무기력한 상황에서 살게끔 되어있다.”고 결론짓는다.

 팡글로스는 “자신은 항상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모든 것이 최선우로 되어간다고 말한 뒤로 이 이론을 계속 주장하고 있을 뿐이며 실상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로플레수사와 파케트가 찾아오고 그들은 온갖 고초를 겪고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팡글로스는 “애당초 신이 인간을 에덴동산에 데려다 놓은 것은 그곳을 경작하게 하기 위함이니까 인간이 쉬려고 태어난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마르탱도 “따지지 말고 일하는 것이 삶을 견딜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작은 땅에서도 많은 소출이 있었다.


  『캉디드』에서는 팡글로스가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연계되어 있다. 자기가 성에서 쫓겨나지 않고 고초를 겪지 않았더라면 이속에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 열매를 먹지 못했을테니까 ”라고 말하자 칸디드가 “옳은 말씀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밭을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종결짓는다.          

『캉디드』에서는 이처럼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베스트팔렌 전쟁, 리스본의 지진과 종교재판, 식민지국가에서의 관리들의 횡포와 노예제도, 해적선에 의한 약탈, 권력자들의 숙청 등의 사건들을 순진한 청년인 캉디드의 눈을 통하여 부조리를 경험하게 되고 독자들에게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러니를 제공하고 있다. 볼테르는 이와 같은 ‘철학적 꽁트’를 통해서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4. 결어(結語)

 

 볼테르는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와 더불어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우화적 소설을 지었는데 흔히 ‘철학적 꽁트’라고 불린다. 1759년에 발표된 『캉디드』는 그가 지은 26편의 ‘철학적 꽁트’ 중에서도 백미 (白眉)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캉디드』의 원래 제목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인데 주인공인 순진한 청년  캉디드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건에 휘말려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낙관주의}에 심취해 있어서 항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낙관주의}가 현실에서는 허구성과 비현실적인 불합리성으로 나타남으로써 아이러니를 깨닫게 된다. 또한 팡글로스로 대변되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 철학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캉디드』에서는 주인공 캉디드를 비롯하여 핑글로스박사, 퀴네공드, 퀴네공드의 오빠인 남작 등의 등장인물들이 분명하게 죽음을 당했으면서도 극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트릭을 차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다.


5. 참고문헌(參考文獻)

 

  1) 볼테르 지음, 윤미기 옮김,『캉디드』, 도서출판 한울

  2) 김영한. 임지현 , 『서양의 지적운동』, 지식산업사, 1994

  3) 「볼테르의 문화사 서술에 관한 고찰」,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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