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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와 삶

봄바람


 

여고동창생들과 함께...

               ♣ 봄바람 ♣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고 그 누가 말을 했던가?

 때는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샘바람이 강하게 불었는데 요즘에는 황사현상만 아니면 사계절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계절이라고 하겠다. 지난달 ‘여고동창 친목회’ 정기모임에서 봄을 맞아 야유회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인천시내에서만 낮에 만나서 밥만 먹고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큰맘 먹고 멀리 가보자고 했을 때 모두가 가정주부라서 당일치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나는 1973년에 여고를 졸업했는데 내가 정월 생이어서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보다 한살 더 많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여고동창들과 한동안 소식을 끊고 살다가 1991년에 몇몇 동창들과 소식이 연결되어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친목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친목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친구들이 들어오고 싶어했지만 인원이 너무 많으면 관리하기가 어려워질까봐 열명만 채우고 더 이상은 사절했다. 그 후 14년 동안 이 ‘친목회’는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꾸준하게 모임을 유지해오고 있어서 다른 동창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 친목회는 이름을 정하지도 않았고 회장도 없고 다만 H가 초창기부터 총무를 맡아오고 있는데 성격이 꼼꼼해서 살림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 지난 98년에는 천만 원을 모아서 동남아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마침 IMF가 터지는 바람에 백만 원씩 나누어 가졌다. 당신 나는 남편의 사업이 부진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 돈으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 후 정기적으로 내는 회비에서 축의금(祝儀金)이나 조의금(弔意金)을 따로 걷지 않고 충당해왔는데 그래도 많은 돈이 남아있어서 이번에 기차여행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현재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총무 H의 남편인 C선생님이 3월부터 넷째 주에 수업이 없다고  운전기사 노릇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래서 4월 23일로 날짜를 정하게 된 것이다.


 이 모임의 친구들은 모두 인천에서 살고 있어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꼭 참석한다. 나도 수업시간이 정해지거나 시험일이 아닌 경우 다른 약속을 뒤로 마루는 한이 있더라도 ‘친목회’에 꼭 참석하고 있다. 내 친구들은 아직까지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이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가 하나에서 셋까지 있고,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어서 모범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 4월 23일 Saturday.

 다른 때 같았으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남편도 흔쾌히 잘 놀다오라고 허락해 주었다.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침준비를 마치고 화장을 하고 남편을 깨우고 6시20분에 집을 나섰다. 남편은 대기업에 근무하지만 현장직이어서 토요일에 출근한다. 작은아들은 22일에 학교에서 MT를 떠나서 집에 없었고, 큰아들도 주말이라 학원에 가지 않아서 깨우지 말라고 했다. 집에서 동인천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H의 아파트로 향했다. 경비실 앞에서 7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근처에서 두리번거리니까 ‘흰색 카니발2’ 승용차안에서 친구들이 타고 있다가 내다보고 부른다. 뒷좌석에 앉자마자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어?”

“아직 오지 않은 친구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침은 먹었어요?”

  “응. 지금 통근버스를 기다리고 있는거야.”

  나는 친구한테 휴대폰을 바꿔주니까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저는 아무개엄마에요.  저는 **엄마에요. 뭐에요? 정말 너무 하신다?”하면서 웃는다.

나는 휴대폰을 돌려받았고 남편은 “잘 놀다가 와.”하고 끊었다.


 나는 25년 동안 결혼생활을 살아오면서 남편한테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험을 보는 날도 아침밥을 차려주고 나갔는데 오늘은 예외적으로 남편이 차려먹고 나갈테니 그냥 가라고 했다.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까 족쇄를 풀어주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친구들이 3명만 가정사정으로 불참하고 총무인 H를 비롯하여 L, J, P, Cho, K, 나 이렇게 7명이 7시 25분에 출발했다. 9인승 승합차인데 C선생님을 포함하여 8명이 오붓하게 갈 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미리 알려주지 않아서 궁금했는데 무주에 있는 덕유산으로 간다고 했다. 8시 25분에 ‘망향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는데 가족단위로 놀러가는 승용차들이 대부분이다. 승용차는 다시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신나게 질주한다.


 드디어 10시 20분에 전라북도 무주군에 위치한 덕유산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시간 관계상 등산로를 들어가지 않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는 둥근 모양의 원통형으로 밖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나선형 계단이 설치돼 있다. 고지대(高地帶)라서 올라갈수록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사방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C선생님이 디카로 단체사진과 개인사진을 찍어주었다. 다시 내려와서 밖에서 사진을 찍고 차를 타고 반대편으로 달려서 안국사(安國寺)에 도착했다. 안국사에는 극락전(極樂殿)과 청하루, 성보박물관(聖寶 博物館)있다. 성보박물관에 들어서니 세계 각국의 불상(佛像)과 탱화가 전시되어 있고 ‘사진촬영금지’ 팻말이 놓여져 있다.


 밖으로 나오니 식수(우물)라고 쓴 팻말이 붙어있다. 13개의 돌계단을 내려가니 물을 떠먹을 수 있도록 자루가 달린 플라스틱 바가지가 둥둥 떠 있다. 먼지와 빗물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붕을 만들어 씌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 TV광고에서 보았던 ‘해우소(解憂所)’라고 쓴 회색빛 건물이 있는데 들어가니 하얀 변기가 놓여져 있고 바닥이 내려다보이는 재래식 화장실이다. 

 

 우리 일행은 11시에 그곳을 출발하여 12시 25분에 전라북도 진안에 있는 도립공원 마이산(馬耳山)에 도착했다. 아침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도로 양쪽으로 만개한 벚꽃이 환상적이다. 승용차를 주차장에 두고 걸어서 마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차도를 제외한 좁은 도로에는 작은 돌들이 깔려있어서 산에 가는 것을 모르고 높은 구두를 신고 간 나는 걷는데 불편했다. 나는 햇볕이 따가워서 오천 원을 주고 썬캡을 사서 썼다.


  마이산은 해발 673m의 암마이봉과 667m의 숫마이봉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콘크리트 축조물처럼 생긴 수성암(水成岩)이다. 마이산은 그 생김새가 기묘하여 서다산(西多山), 용출산(湧出山), 속금산(束金山), 馬耳山으로 개칭하여 왔고, 금강산처럼 계절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불려지고 있는데 봄에는 돋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이라고 불리운다. 암마이봉 절벽아래 위치한 마이산 탑사(塔寺)는 지방기념물 제 3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1885년부터 이갑용이라는 분이 30여년에 걸쳐서 축조한 자연석 탑으로 높이가 1m부터 15m에 이르는데 현재 80여개가 남아있다.


 馬耳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옛날 남녀 두 신선이 자식을 낳고 살다가 등천할 때가 되어 男紳은 밤에 떠나자 하고 女紳은 낮에 떠나자 하다 이른 새벽에 등천하기로 하였는데 새벽에 물을 길러 나온 아낙이 보고  산이 자라고 있다고 소리를 치다 그대로 주저앉아 馬耳山이 되었다고 한다.

    

 마이산 탑사에 오르기 전 500m 지점에 위치한 탑영제(塔影堤) 저수지는 본래 관광풍치(觀光風致) 조성을 위해 축조되었는데 탑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대신 암마이봉과 니도산 봉두굴이 정취를 자아내고 수면에 비춰지고 있어서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탑사에서 서남방 1km 지점에 위치한 금당사(金塘寺)는 1300여년 전 고구려 보장왕 때 무상화상과 김취라는 사람이 창건했는데 삼존목불, 쾌불, 오층석탑 등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특히 지방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존불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하나의 커다란 은행나무 통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가로 230m 높이 165m의 조각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다.


 탑사와 탑영제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오면서 친구들과 생표고버섯과 두릅을 사고 한참을 걸어서 오후 2시에 식당에 들어갔다. 순두부찌개와 순두부전골, 묵무침, 해물파전을 시키고 동동주를 따라서 건배를 했다. 나는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데 오랜만에 두 잔이나 마시니까 속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2시40분에 식당을 나와서 다시 한참을 걸어서 주차장에 세워진 승용차를 타고 3시10분에 출발하여 4시50분에 도립공원(道立公園) 대둔산(大屯山)에 도착했다. 대둔산은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충청남도 논산군 벌곡면과 금산군 진산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인적이 드물고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데서 대둔산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대둔산은 해발 878m로 마천루, 칠성봉, 용문굴, 석두골 거북바위, 장군봉, 삼선바위, 금강문과 구름다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둔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김제 만경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수평으로 이루어진 금강구름다리는 임금바위와 입석대 사이를 지나 금강문에 이르는 높이 81m, 길이 50m의 구름다리다. 삼선바위는 수직으로 된 철제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C선생님은 운전을 해야 하니까 차에서 쉬고 우리 일행은 케이블카를 타기로 하고 3층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나와 J가 화장실에 다녀오니 그 사이에 다른 친구들이 탄 케이블카가 올라가고 있었다. 케이블카는 20분 간격으로 상행선과 하행선으로 교차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오후 6시반의 하행선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나와 J는 다음 케이블카로 올라가서 먼저 도착한 친구들한테 의리가 없다고 했더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닫히자마자 출발했다고 한다. 나는 높은 구두를 신고 많이 걸었더니 발이 아프고 127개나 되는 철제계단을 오르기에는 무리가 되어 케이블카가 정지하는 전망대(展望臺)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대둔산은 2000년에 회사에서 야유회로 다녀온 적이 있어서 오르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다음 케이블카에서 중국인 관광객 십여 명이 나와서 전망대로 올라왔다. 오십대로 보이는 여자 가이드와 삼십대로 보이는 남자 가이드가 그들을 인솔하고 와서 중국어로 설명을 했는데 나는 그들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다 보았다. 그들은 금방 철제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진 나는 남편과 통화를 하고 전망대 아래에 펼쳐진 절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약 30분쯤 후에 친구들이 돌아와서 편하게 쉬고 있었으니 벌칙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라고 해서 샀다. 다시 하행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니 6시다. C선생님은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나와 있었다. 근처에 있는 [강경토굴액젓공판장]에 단체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더덕장아찌와 생선을 끓여서 만든 쌈장, 간장에 절인 짠지를 샀는데 매출이 많아지자 주인의 입이 벌어졌고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일행은 6시20분에 대둔산을 출발해는데 9인승 승합차라서 고속버스 전용도로를 쉬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지쳤는지 더러는 잠을 자고 더러는 얘기들을 했다. H는 C선생님이 졸기라도 할까봐 계속 말을 시키고 음악도 크게 틀었다. 나는 맨 뒷좌석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서 밖을 내다보니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데 고속도로 양쪽으로는 간간히 대기업의 입간판이 보이고 예쁜 성(城)같은 모텔(MOTEL)과 호텔(HOTEL)이라고 쓴 커다란 네온사인 글씨들이 멀리서도 잘 보인다. 어떤 지역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가까운 곳에 모텔도 단지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가 불경기인데도 술집과 MOTEL은 계속 성업을 하고 있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일행은 드디어 오후 8시 45분에 인천 장수동에 도착했다. 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을 전문적으로 하는 식당들이 여럿 있었는데 우리는 가정집을 개조한 파란색 기와지붕의 제일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예전에 가정에서 사용하던 대로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푼에 밥을 담아서 각자가 퍼서 먹게 하고 밥그릇과 물그릇도 스테인리스 대접이다. 친구들이 휴대폰으로 남편과 통화를 하기에 나도 집에 전화를 걸었다. 작은 아들이 MT에서 돌아왔고 아들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나는 남편을 C선생님과 통화하게 했는데 같은 남자들끼리라 그런지 스스럼없이 전화를 주고받는다.

 나는 C선생님한테 이메일과 블로그주소를 적어주고 “오늘 야유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블로그에 올릴 건데요. 오늘 주연은 단연코 C선생님이세요. 기대를 하셔도 되구요, 이메일로 디카사진을 꼭 보내주세요.”했더니 친구들이 웃는다.


 앞으로 회비를 올려서라도 돈을 모아서 다음에는 중국으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식당에서 나와서 H의 아파트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이다. H와 C선생님한테 “오늘 수고가 많으셨어요. 편히 쉬세요.”하고 인사를 하고는 K의 승용차편으로 편하게 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니 10시 40분이다. 우선 온수로 샤워를 하고나니 잠이 스르르 밀려오는데 컴퓨터를 켜고 블로그에 들어가서 댓글과 게시판의  글을 읽고 몇 분의 글을 읽고는 컴퓨터를 닫았다. 주방에 들어서니 저녁 설거지가 말끔하게 되어있는데 “누가 설거지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큰아들이라고 한다. 역시 장남은 어딘가 다른 것 같다.

 

                 2005년  4월 24일 Sunday. 

 오늘은 오전 10시까지 정신없이 잠을 자고 일어났다. 굉장히 피곤하다.

아침을 먹고 나서 블로그에 들어가서 댓글을 읽고 몇 분만 방문하고 어제 놀러갔던 기행기(紀行記)를 쓰기 위해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제 마이산과 대둔산에서는 기념으로 팜플렛을 사왔는데 참고로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후에 잠시 쉬면서 집안일과 청소를 하고 컴퓨터를 켰더니 C선생님이 이메일로 디카사진의 파일을 보내왔다. 작은 아들의 도움으로 알씨에 저장을 하고 [플래닛]의 ‘포토’ 란에 4장을 올려놓았다. C선생님은 나보다 더 피곤했을 것이다. C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어제처럼 여러 장소를 구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지천명(知天命)을 맞은 일곱 명의 여자들은 남편들의 합법적인 묵인아래 봄바람을 즐기고 돌아온 것이다.


       友瑛               2005. April.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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