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종대왕영릉 답사선정 이유
2023년 관광학과에 편입학하면서 4학년 2학기에 1학년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 과목을 수강하면서 출석수업을 받았다.
2024년 10월 13일 방송대학교 인천지역대학 관광학과 동문과 재학생이 함께 문화 해설사를 예약하고 동문지역답사에 다녀왔는데, 출석수업 과제물로 채택하게 됐다.
해설사에 의하면 최근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하여 약 2만 여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관광버스에서 주차장에 내려서 매표소에서 단체 관람표를 사서 줄지어 입장했다.
미리 예약한 문화해설사가 도착해서 인사를 나누고 ‘세종대왕릉 가는 길’ 표지판을 따라 세종대왕로 답사가 시작된다.
세종대왕영릉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의 입상을 보는 순간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과 아우라가 느껴진다. 광장에는 세종대왕 당시 발명품들이 복제되어 전시되어 있고 설명표지판이 함께 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동문과 학우들의 표정을 보니 수첩에 적거나, 사진을 찍으면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일반 방문객들도 동참하여 해설사의 해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양반 가옥 같은 기와집 형태의 재실이 소실되어 1970년에 성역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 상문과 행랑, 제방 안채만 복원되었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과 령 등이 지내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집무실인 재실, 제향을 준비하는 진사청,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부속공간인 행랑으로 구성돼 있다.
붉은색을 칠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운 홍살문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곳인데, 왕릉을 출입하기 위한 정문이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는 ‘어로’와 ‘향어로’로 나뉘어 바닥의 높낮이가 다르게 돼 있다. ‘어로’는 임금이 다니는 길로 울퉁불퉁한 박석을 깔아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기 위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정자각은 매년 정해진 기일에 제향을 올리기 위해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세종대왕영릉에서는 매년 양력 4월8일 세종대왕과 4월 28일 소헌왕후를 위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듣기 전에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정자각 앞에는 기신제를 어떻게 지내고, 어떤 제가들을 사용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제수진설도가 놓여있다. 소헌왕후 영릉를 조성하면서 3칸 정전 좌우에 익칸 1칸씩을 덧붙여 5칸으로 확대하고, 배위청을 3칸으로 늘린 8칸 정자각을 지어 유교식 제의를 강화하였다.
세종대왕영릉의 산처럼 거대한 왕릉을 보니 그 규모에 압도됐다.
왕릉의 훼손을 방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영릉 주변에 경계 두어 너무 가까이에 가지 못하도록 줄이 쳐 있다.
세종대왕영릉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세종대왕역사문화관으로 향했다.
역사문화관 입구에는 한글 자음을 형상화하여 비치해놓았다.
역사문화관에 들어서니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금속 판각으로 만들어져 있고, 세종대왕이 한글로 풀이하는 동영상이 있다.
이 밖에도 세종대왕의 일상과 업적, 세종대왕 어진, 궁중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세종대왕영릉 답사 내용
(1) 세종대왕의 생애
세종대왕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 4남4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이다.
1412년 5월 충녕대군에 봉해졌고, 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왕세자로 봉해졌다가, 같은해 8월10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5명의 후궁 사이에서 8명의 왕자와 4명의 공주(옹주)를 두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릉을 조성하였고,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여 영릉을 조성하였는데,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2) 세종대왕의 업적
세종이 통치하던 15세기 전반기에는 동아시아는 원과 명의 교체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세종의 대중국 정책은 사대와 자주를 구분하여 형식적인 면에서 ‘사대의 예’를 실천하였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은 대의의 나라’라고 주장할 때 자주정책을 추구하였다.
일본과 여진과는 회유정책을 펼쳐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태도는 강력하게 웅징하여 백성의 안전과 영토를 지켰다. 세종 재위시기 동아시아 질서는 조선이 주도하면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419년 대규모 일본 왜적이 서천지역에 침입한 데 맞서 조선이 먼저 대마도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과 일본은 차츰 평화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조선은 항복한 왜구에게 관직을 수여하거나 교역을 허락하여 우방으로 만드는 정책을 펼쳤다.
세종시기에 발명한 발명품들은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 휴대용 해시계인 ‘천평일구’,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려주는 해시계인 ‘정남일구’,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낮과 밤 언제든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천문기기인 ‘일성정시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저절로 움직이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 등이 있다.
세종대왕은 재위 32년 동안 정치. 사회. 경제 등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세워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한글창제는 세종대왕의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손꼽힌다. 한글은 천 (하늘). 지(땅). 인(사람)을 상징하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적인 원리와 창의성이 인정되었고, 디지털기기에서도 빠른 시간 안에 문서로 작업할 수 있다.
한글은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구성되었는데 , 자음과 모음만으로 수많은 글자를 생산할 수 있다.
3.세종대왕영릉의 역사적 의미
조선시대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왕릉의 조성과 관리에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하였다.
능묘에서 왕릉은 국장의 대상이 되는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최고 지배자들은 거대한 무덤을 조성했고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은 총 42기이다.
이중 북한에 소재한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유네스코 시게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조선 왕릉을“역사성이 깊은 살아있는 유산”과 “자연 친화성을 갖춘 신들의 정원”이라고 묘사하였다.
세종대왕영릉은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 최초의 합장릉 형태를 띠고 있다.
왕릉은 조선 중기 왕릉 배치에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제도를 따랐다.
세종대왕영릉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꾸준히 방문하여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영. 20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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