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장녀 ♠
‘K장녀’는 Korea(한국)와 맏딸을 의미하는 장녀가 합성된 신조어다.
고려시대에는 재산상속과 제사에 있어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봉건적인 유교사상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중심으로 절대적이었다.
친정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삯바느질을 하셨다.
장녀인 어머니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외삼촌 두 분의 뒷바라지를 했는데 작은외삼촌이 총경까지 진급하셨다.
외가에서는 식모를 두고 살면서도 엄마한테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나는 전형적인 ‘K장녀’로 가난한 집안의 4남매의 맏딸이다.
버스운전사인 아버지는 격일제 근무를 하시고 쉬는 날에는 주무시거나 친구를 만나서 술을 드시고 들어오셔서 집안일을 도와주시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산동네에 살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나물을 캐오고 어머니를 도와서 연탄과 수돗물을 날랐다.
나는 아버지 작업복과 동생들 운동화까지 내가 빨았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 인천여중에 입학했다.
중학교 1학년 때 12살 터울의 막내동생이 태어났는데, 백일이 지나 소아마비 판정을 받으면서 가정형편 때문에 실업계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중학교 동창생을 만날까봐 창피했는데 어머니는 내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시고 “네가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 집안 형편이 나아질텐데” 하시며 정신적으로 부담을 주셨다.
여고를 졸업하고 내 수입으로 동생들은 조금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여동생도 나처럼 여고를 나와서 직장생활을 해서 친정에 도움이 됐다.
3층짜리 상가건물 두 채를 소유했지만 남동생의 사업으로 두 채가 공중 분해됐다.
당시에는 내가 친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졌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가 희생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나는 친정어머니가 할머니한테 시집살이를 당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버지한테 가정폭력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어머니는 나한테 억울함을 호소하셨는데 나는 항상 어머니 편에 서서 아버지한테 항의도 해보고, 어머니의 감정의 쓰레기통을 역할을 자청했다.
맏딸로서 어머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친구를 만나기보다 일찍 집에 돌아와서 집안일을 도왔다.
막내동생이 태어나면서 기저귀를 빨고, 동생을 업어 키우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초등학교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다.
어머니와 얘기하면서 여름에는 코바늘로 레이스 뜨기를 배우고, 겨울에는 털실로 스웨터와 목도리와 장갑을 뜨는 것을 배웠다.
어머니와 친교가 형성되면서 된장과 고추장 식혜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
춘천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한 달에 한 번 인천에 온다.
낮에 친구들을 만나고 저녁에 내 집에서 자고 가는데 어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하다보면 “언니와 내가 남동생들 보다 차별대우를 받아서 서운하다.”고 토로한다.
지금도 많은 ‘K장녀’가 존재하고 있다.
친정에 50대와 60대인 두 동생은 무직으로 살고 있다.
큰남동생 딸이 30대 초반인데 어려운 집안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고 도움을 주고 있다.
막내 남동생 딸도 공무원에 합격해서 집안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友瑛. 2020. 11. 21
3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