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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 Report

세상읽기와 논술

              2015 학년도 ( 1)학기 과제물

 

 

교과목명 : 세상읽기와 논술

 

: 20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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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과제유형 : ( C )

 

o : 가족들이나 지인들 2인을 택해 격려나 화해, 감사, 회한

 

등의 상념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써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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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친정어머니! 감사합니다.

2. 자랑스러운 내 아들 상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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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정어머니감사합니다.

 

어머니! 2015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밤샘공부 하느라 자정을 넘긴 시각에도 책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잠시 무거운 눈꺼풀을 진정시키느라 아파트 베란다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별은 보이지 않고 건너편 아파트에 불빛이 이 빠진 치아처럼 듬성듬성 보입니다.

어머니는 지금쯤 잠자리에 드셨겠지요? 어머니가 제 곁에 계셨다면 얘야! 직장에 다녀오고 공부하느라 피곤하겠구나. 이제 들어가서 자거라.”라고 말씀하셨겠지요.

 

어머니와 저는 같은 양띠로 24살 차이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4남매의 맏딸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저한테 늘 살아온 얘기를 해주시면서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지금 2년 전부터 찾아온 치매(癡呆)와 사투를 벌이면서 지나온 과거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낳은 네 명의 자식들과 손자 이름 정도만 기억하실 뿐 손자가 결혼한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사위나 며느리, 손자며느리한테 누구세요?”라고 물어보셔서 당황하게 합니다.

 

저는 늦은 밤 잠시 어머니의 삶을 반추(反芻)해보려고 합니다.

올해 85세이신 어머니는 1931년에 충청도에서 태어나서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격동의 한국근대사를 살아오신 분입니다.

가난한 4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외할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서 초등학교만 졸업하시고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과 사과를 팔았습니다.

그 후 서울에서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외할머니와 함께 두 분의 외삼촌을 뒷바라지하셨는데, 작은외삼촌은 총경까지 계급이 오르시고 경찰간부로 퇴직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직전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8남매의 장남인 친정아버지와 중매로 결혼하셨습니다. 시부모님까지 열 식구나 되는 대가족이지만 쌀이 부족해서 어머니는 늘 숭늉을 푸고 남은 눌은밥만 먹었다고 합니다.

결혼하자마자 저하고 세 살 위인 막내시동생이 태어나서 새댁 때부터 시동생을 업어 키웠고, 먹는 것은 부실한데 밭일과 새참까지 일이 고되어 결혼 후 삼년 만에 제가 태어났지만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박을 받았습니다.

1955년에 저를 낳고 다음해 임신했지만 유산을 하고, 1958년에 다시 여동생을 낳고 1960년에 큰남동생을 낳으셨습니다.

아버지는 1929년에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자동차 운전과 정비기술을 배우셨습니다. 해방 후 운전기사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 때 입대하여 운전병으로 복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운전하는 외에는 일을 하지 않으셔서 운전하다 접촉사고라도 나서 정지기간에는 집안에만 계시다보니 수입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자들한테 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가 남의 밭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거나, 생선과 떡을 받아서 함지박에 이고 동네마다 다니면서 팔고, 집안에서 돼지와 개와 닭을 길러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서 옥수수빵을 배급받았고, 소풍과 여행을 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인천교대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인 <인천여자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합격자 발표일은 모처럼 부모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처음으로 외식으로 떡국을 사주셨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제가 중학교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9월에 저와 띠동갑인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백일 때쯤 소아마비로 판명되어 그때부터 집안에 냉기류가 감돌았습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날이 많아졌고, 어머니는 막내동생을 안고 울면서 다리를 고쳐보려고 전국에서 용하다는 곳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저는 밥을 짓고 동생들을 챙기면서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시험 때는 친구 집에서 공부하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돌아왔습니다.

교대에 진학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되면서 사춘기에 반항심이 생겨서 어머니하고 마찰이 잦았습니다.

3학년 때 친구들은 인문계 원서를 쓰는데 저는 상업계 여고로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부반장도 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 선생님한테 모범생으로 인정받았지만, 집에서는 말수가 없고 동생들한테도 쌀쌀한 아이로 변했습니다.

제가 여고를 다니는 동안 여동생과 큰남동생이 줄줄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셋이 등록금도 밀려가면서 내야 했습니다.

 

제가 여고를 졸업하고 이모부님의 추천으로 운수회사에 경리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차차 집안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저도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적금을 들어서 밭을 샀는데 몇 년 후 개발이 되면서 땅값이 올랐습니다. 여동생도 졸업하여 호텔리어로 근무하면서 아버지와 두 딸이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19793층짜리 상가주택을 지었습니다.

저는 80년에 결혼하고 어머니가 살림을 잘 하셔서 주위에 낡은 집을 사서 헐어내고 19863층짜리 상가를 한 동 더 지었습니다.

 

1989년에 큰동생이 전문대를 졸업하고 막내동생을 데리고 수입공구 대리점을 시작했는데 사업자금을 대주다보니 10년 만에 상가건물 두 채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더 이상 사업자금을 대주지 마시라.”고 했지만 너는 출가외인이니 상관하지 마라. 어차피 우리가 죽으면 **한테 물려줄 건데하시며 일축하셨습니다.

막내동생은 아파트까지 날려버리자 이혼했고, 부모님이 손자와 손녀를 보살피면서 임대아파트에서 살아오셨고 아버지는 2010년에 파키슨씨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두 딸한테 고생만 시켜서 너무 미안하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손자가 성인이 되어 군입대를 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평화롭게 살아왔는데 어머니가 2013년 가을부터 치매중세를 보이기 시작하셨습니다.

두 달 전부터 증세가 악화되어 춘천에 사는 여동생한테 가셨습니다. 막내아들하고 살 때는 딸집에 가겠다고 하셨고, 지금은 아들집에 가겠다고 하신다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 대학교에 가지 못한 학력콤플렉스로 우울했던 마음이 1994년부터 방송대학교를 통해서 국문학과-법학과-중문학과-일본학과에 이르기까지 공부하면서, 젊어서 일반대학교를 졸업했다면 느껴볼 수 없던 성취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저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젊어서 가난을 경험했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본능적으로 당신의 자식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어머니와 통화했을 때 건강하고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장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5월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보내드리고 10일 휴일에 찾아뵙겠습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20154월 맏딸 정숙이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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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랑스러운 내 아들 상현아!

 

너는 아버지와 연애로 만나다 결혼해서 태어난 우리집의 보물 1호란다.

당시 외가는 3층짜리 상가건물을 소유하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아버지의 본가는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고 있고 아버지가 생활비를 보태는 입장이라 결혼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외가에서는 내가 결혼하게 되면 고생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와의 결혼을 반대하였는데 엄마가 결혼을 강행했지만 연애와 달리 결혼은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사람은 선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경제관념이 약했다. 네가 태어나고도 고정수입이 없는 데다 사업을 하겠다고 하여 외가에서 미움을 받았다.

처음에는 직장생활을 하다 외가의 도움으로 큰아버지와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엄마가 관여할 때는 장부관리가 잘 됐는데 큰아버지가 관리하고부터 돈을 쓰고 세금도 제 때에 납부하지 않고, 처가에 돈을 대주면서 아버지 명의로 대출을 받아 이자도 갚지 않아 독촉받았다.

설상가상으로 IMF가 터져서 사업을 접으면서 빚을 아버지 혼자 떠안게 됐다.

당시 너는 고3이고 네 동생은 고1인데 대학교에 보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둘 다 잘 극복해주었다.

 

네 동생 상원이는 SKY로 불리는 <연세대학교> ‘토목공학과에 합격하여 중학생의 과외지도를 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너는 택배 분류작업과 주차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도권 4년제 공대 디지털미디어학과에 두 학기 다니다가 휴학하고 군입대를 했다.

제대 후에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퇴하고 전문대학 실용음악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와 엄마는 무척 실망했다.

너는 밤잠을 줄여가면서 헤드폰을 쓰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작곡을 했고, 등록금을 50% 감면받으면서도 칭찬 한 마디 듣지 못하고 졸업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음악이 밥 먹여 주냐?”라는 쓸데없는 학문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었지만 너는 서운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너는 졸업 후 유학원에서 1년 동안 준비한 후 일본에서 유학하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우리 부부는 빨리 직장을 잡아서 결혼하라고 했다.

너는 결혼하면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없으니 공부부터 마치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20099월에 일본에 건너가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하고 <일본경제대학교> ‘경제학과에 합격하였다.

 

너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20131유학생 스피치대회에 출전하여, 40세에 방송대학교에 도전한 엄마 얘기를 모티브로 하여 무언가를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게 늦은 것은 아니다.”라는 주제로 특별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유학생 음악콩쿨에서도 수상했다.

그리고 2015318일에 우리 부부가 졸업식에 참석하고 드디어 경제학사 학위를 받았는데 엄마는 네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너는 졸업 전에 운전면허증도 취득하고, 일본 기업체에 취업이 확정됐다.

너는 일본인도 쉽지 않은데 외국인 신분으로 당당하게 취업이 된 것이다.

41일 직장 연수의 시작과 더불어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는데 네가 가장 돋보이더구나.

내 아들아! 지난 6년 동안 외국에서 고생 많았다.

앞으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열심히 살아가기 바란다.

20154월 엄마가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