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미친 존재감 방송대학교 ♦
나는 한국전쟁이 끝났지만 폐허가 채 복구되지 않아 모두들 주거문제는 물론 입고 먹을 것조차 부족한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가정의 4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시절에는 학생 수가 많아 콩나물 교실에다 교실이 부족해서 군용천막으로 만든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지 못해서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배급받아 먹었다.
당시에도 비교적 가정형편이 유복한 친구들은 도심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비교적 편하게 살았다. 하지만 나는 같은 인천 지역이지만 외곽의 산동네에 살고 있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기와 수도 공급이 안 돼서 저녁이면 호야에 석유를 담아 불을 켜고, 공동수돗가에서 줄지어 수돗물을 길어다 사용할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학력비평준화 정책으로 일류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입주 대학생한테 과외지도를 받았고, 학부모가 자식을 좋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수시로 학교에 찾아가서 선생님과 입시에 대한 상담을 하였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먹고 살기에 바빠서 6학년 때 겨우 담임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합승 운전기사였고 어머니는 남의 밭을 일구거나 집에서 돼지와 토끼, 닭을 키웠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토끼풀을 뜯어왔고 어머니를 도와 공동수도에서 물을 긷고 집안일과 동생들을 보살펴주어야 했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에도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당찬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과외지도를 받는 친구들과 경쟁하기 위해 전과와 수련장만으로 책이 닳아버릴 정도로 쓰고 외우는 것을 반복한 결과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1967년에 경기도에서 알아주는 <인천여자중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당시 <인일여고>는 <인천여중>과 동일계 학교인데 해마다 서울대만 60명이상 합격할 정도로 명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모님은 교대를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인일여고>에 가기만 하면 나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늘은 나에게 그런 행운을 주지 않았다.
1967년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는데 9월18일에 막내남동생이 태어났다.
부모님은 두 딸과 아들 하나만 있었기에 둘째 아들이 태어난 것을 무척 기뻐하셨고 집안은 잔칫집분위기였다. 하지만 막내 동생이 백일이 지나자 일으켜 세우면 쓰러지고 기지도 못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니 소아마비라는 병명이 나왔다.
이때부터 집안은 초상집분위기로 변해갔고 아버지는 쉬는 날만 되면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어머니와 싸우셨고, 어머니는 동생을 안고 울고 계셨다. 어머니는 오로지 아들의 치료에만 신경 쓰셨고 집안형편이 더욱 나빠지면서 등록금도 밀렸다.
남동생은 어머니의 극진한 정성으로 목발을 짚는 것은 면했지만 결국 한쪽 다리는 발육이 부진하여 절룩거렸고 성장이 이루어진 고등학교 3학년 때 수술하였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부모님한테 눈치가 보여서 학교가 파하면 학교 도서관이나 친한 친구 집에서 공부하다 돌아오곤 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진학상담을 해야 하는데 집안형편 때문에 <인일여고>를 포기하고 실업계여고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도 가족들이 찾아와서 기뻐하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쓸쓸하게 자유공원에 올라가서 시내를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늦게 학교에 갔는데 서로 어긋나서 너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셨다.
나는 졸업 후 경리사원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1980년에 결혼했다.
1986년에 큰아이를 보습학원에 보냈는데 수강료를 내러 학원에 갔다.
학원장이 <방송대학교> ‘초등교육과’를 졸업했다는 얘기를 듣고 방송대학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됐지만 당시는 아이들이 어려서 몇 년을 기다렸다가 작은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1994년에 ‘국문학과’ 1학년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여고졸업 후 31년 만에 받아든 교과서는 무척 무거웠다. 실업계를 나온 나는 대학영어에서 문법이 막혀 많은 시간을 공들여 공부한 결과 학점을 취득했다.
나는 한자 세대여서 한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1999년 2월에 國文學士가 되면서 대학졸업의 한을 풀었다. 하지만 졸업 후 1년을 쉬다 보니 어딘지 허전함이 느껴졌다.
나는 평소 법에 관심이 많아서 2000년에 ‘법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2003년 2월에 졸업했는데 어려운 법률용어를 해석할 수 있게 되어 법률상식이 늘었다.
나는 2004년에 ‘중문학과’ 2학년에 편입하여 2009년에 졸업했다. 나는 2년간의 휴식기를 보내고 여고시절 제2외국어로 배웠던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2012년에 네 번째로 ‘일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나이가 들어서 배운 중국어는 겨우 간단한 인사말 정도와 해석밖에 할 수 없는 실력이지만 일본어는 기초가 있어서인지 열심히 공부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1970년대 정부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 고등학교로서 ‘관광과’가 설립되었는데 나는 4회 졸업생이다.
고3 여름방학동안에는 <유신고속관광>에서 실습을 하면서 관광가이드의 보조로 탑승하여 짧은 일본어지만 일본인 관광객의 안내를 한 적이 있다.
관광가이드를 전에는 통역안내원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관광통역사로 바뀌었다.
나는 여고 졸업 후 일본어 공부를 더 해서 가이드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웠고 이모부님의 소개로 운수회사 경리로 취업이 되는 바람에 가이드의 꿈을 접었다. 나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관광안내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서 재학 중에 열심히 공부하여 JLPT 1급과 관광통역안내사 시험에 합격하여 멋진 인생을 살고 싶다.
나는 결혼 후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사업을 하면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늘 스트레스가 쌓이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남편이 인테리어사업을 하다 IMF를 맞아 거액의 부채를 지면서 사업을 접고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집안에만 안주할 수 없어서 남편이 2년 간 쉬는 동안 나는 두 아들의 교육비를 벌기 위해 전업주부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방송대학교서 공부하면서 컴퓨터를 배웠고 결혼 전 경리업무 경력과 방송대학교 학력과 컴퓨터 활용능력이 있었기에 경리사원으로 취업이 가능했다.
나는 이력서에 방송대학교 졸업생임을 밝혔는데 사장님이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채용되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문자와 언어를 구사하는 고등동물이므로 평생 동안 많은 것을 배우면서 살아간다. 현대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
<방송대학교>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려는 사람들한테 더 없이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는 교육기관이다.
나이가 들어서 시작한 공부를 할 때는 체력이 달려서 쉽게 피곤함을 느끼지만 시험을 치른 후 결과가 좋으면 마치 거액의 로또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분이 업(UP)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방송대학교에서 십 수 년 동안 공부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방송대학교>는 나를 미치게 하는 존재감이 있다. 그리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중독성이 있어서 졸업하고도 다시 입학의 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 같다.
2012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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