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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 Report

아시아의 거인 중국의 경제발전과 화교의 영향력

 

                                 ♣ 목  차   ♣



1. 中國의 경제발전 과정과 華僑의 影響力...................................2


1). 中國의 經濟改革과 發展過程


2). 韓中 修交와 經濟關係


3). 中華經濟圈의 浮上과 華僑 商人


2. 나의 見解............................................................................4


3. 參考 文獻.............................................................................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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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中國의 경제발전 과정과 華僑의 影響力

  1). 中國의 經濟改革과 發展過程

1966년~1976년까지 십 년 동안 강청을 비롯한 4인방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文化大革命(일명 문혁)’은 중국과 중국인에게 발전을 저해(沮害)하는 재앙과도 같은 시기였다.

1976년 모택동과 주은래가 서거하고 정권교체라는 과도기를 지나 1978년 등소평의 시대가 열렸다. 중국 공산당은 11기 3중전회에서 대외개방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등소평의 시대가 성립하였다.

등소평은 실용주의를 중심으로 한 현대화 계획을 선언하였고, 5차 5개년계획을 진행하면서 선진설비와 기술을 도입하고 부족한 자본을 外資로 충당한다는 開放政策으로 전환하였다.


등소평의 改革政策과 開放政策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일대 革新을 가져왔다. 1979년 이후 등소평은 보수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앙집중식 경제를 포기하는 대신 자본주의 개방경제 체제를 도입하였다.

1982년 4월 인민공사를 해체하여 농산물의 도급제를 채택하였는데 도급한 책임 생산량을 달성한 후 생산물을 자유롭게 판매하도록 인정했다. 또 부업으로 수입을 올리는 것을 장려하여 생산성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공업 부문에도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기업 경영자의 이윤 처분의 자주권이 인정되었다. 또한 적자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국유기업의 경영혁신을 꾀하여 만성적인 경영적자에 허덕이는 국유기업의 현대화 작업을 단행하였다.

소비재 상품의 독립생산체제를 해체하고 가격 자유화를 단계적으로 단행하는 등 완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착실하게 수행해갔다.

이로써 중국은 1978년에 경제개혁을 착수한 이후 2001년까지 20년 동안 연평균 9.4%의 GDP성장률을 기록하였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편입하였다. 특히 경제특구인 연안지방에 거주하는 인구 중 5000만 ~6000만 명은 1인당 소득이 3000달러 수준이고, 심천 지역은 6000달러의 높은 구매력을 가지고 있다.

2). 韓中 修交와 經濟關係


개혁과 개방 이후 중국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국과 대만과의 관계개선이었다. 중국은 한국과 먼저 경제관계를 맺고 1992년 8월 公式修交를 체결함으로써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1992년 수교 당시 양국간의 교역량은 63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2003년에도 9배가 넘는 570억 달러를 기록하여 중국은 일본, 미국과 함께 우리의 3대 교역국이 되었다. 우리 기업의 중국에서의 직접투자 활동도 활발하다. 이제 중국은 미국에 이어 우리의 제2투자 대상국이 되었다.

중국에 대한 우리의 직접 투자는 수교 직후인 1992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되어 1995~1996년에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그후 국내 구조조정과 지금여력의 한계로 위축되었다가 지난해부터 다소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3). 中華經濟圈의 浮上과 華僑 商人


중화경제권은 1980년대 중반 중국, 홍콩, 대만의 상호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부터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동서냉전이 끝난 후 세계경제는 미국. 유럽. 아시아라는 세 개의 축으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서도 중화경제권은 가장 역동성을 보이고 있으며 태평양시대의 중심경제권으로 부상하고 있다.

중화민족의 경제권의 중심인 중국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1997년에 영국으로부터 홍콩의 주권을 되찾았고, 199년에는 포루투갈령 마카오의 주권을 건네받음으로써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정지역에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는 1국2체제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경제권을 움직이는 것은 홍콩과 대만의 화교자본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미국 및 서방국가들이 중국 정부에 경제제재를 가했지만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화교 巨商들의 자본이 유입되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화교의 해외 이주는 9세기 말 당나라 때 북방민족들의 침략을 받아온 중국인들이 전쟁을 피하여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 때문에 세계 각국으로 이주를 계속하였다. 현재 전 세계에 5,600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중 85%가 동남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에서는 중소기업의 90%가 화교 소유로 돼 있다.

화교 상인들은 새로운 지역에서도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여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언제나 本土로의 회귀본능을 가지고 있다. 세계 각국에 산재하는 차이나타운의 지하금융은 일시적으로 세계 금시장의 가격을 폭등시킬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2. 나의 見解


우리나라는 1992년 8월에 그동안 우방국이던 자유중국과 斷交하고 중화민국과 정식으로 수교관계를 체결하였다. 올해로 韓中修交 15주년이 되는데 인천광역시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중구청과 중구 북성동 ‘차이나 타운’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중심이 되어 ‘韓中 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인접국가로서 삼국시대부터 적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는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물리치는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게다가 같은 漢字를 사용하였고, 일제시대에는 똑같이 일본으로부터의 피해국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儒敎를 숭상하는 민족으로서 문화가 비슷하여 不可分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지금은 中國이라고 불리지만 내가 여고를 졸업하기 전까지 臺灣을 自由中國이라  불렀고, 중국을 中共(중국 공산당)이라 불렀다. 중국은 현재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1966년에서 1976년까지의 모택동 집권 중 4인방에 의해 주도되었던 문화혁명기간은 현대 중국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는 誤謬를 범했다. 그 기간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수많은 유교경전 및 학문적 가치가 소실되었다.


중국은 1978년 등소평이 집권하면서 실용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5차 5개년계획을   세우고 선진국의 앞선 기술을 도입하는 개방정책을 취하였다.

등소평의 개혁정책과 개방정책은 舊 소련의 ‘鐵의 帳幕’과 더불어 ‘竹의 帳幕’으로 불렸고 폐쇄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수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9년 등소평은 강경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본주의 개방 경제체제를 도입한 결과 연 평균 10% 이상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중국이 아시아의 새로운 經濟 大國으로 浮上함에 따라 경제 중심이 중국으로 집중되고 있다. 중국은 광활한 국토와 13억이라는 거대한 인적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고등학교 이상 교육을 받은 사람을 중산층으로 인정하여 국내의 기업에서 근무하게 하고,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대부분의 시골 출신들은 하층민으로 분류하여 저임금으로 외국 기업 유치의 발판을 삼았다. 하지만 최근 중국 정부에서는 자국에서 거주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세금 및 근로자 임금 인상에 대한 법률을 시행중에 있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한중 수교 이후 저임금의 매력에 너도나도 중국으로 기업체를 이전하였지만 10개 기업 중 서너 개 기업만이 흑자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중국에서 근로자에 관한 입법이 실행하게 되면 외국 기업에 비교적 관대한 인도나 베트남으로 기업체를 옮기게 될 것이다.

중국이 달라졌다. 예전에 中共으로 불리던 시절에는 경제 중심지인 상하이가 도로에 자전거가 즐비하고 중국 사람들의 옷차림도 대부분 노동자로 보이는 칙칙한 색상이었다. 또한 다닥다닥 붙어있는 공동주택은 문이 없어서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없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하지만 경제개혁과 개방을 실시한지 20년이 지난 오늘날 상하이는 도로에 자동차가 넘쳐나고 옷차림이 화려해졌으며, 고층빌딩이 하루가 다르게 우후죽순처럼 올라가고 있어서 중국사람들조차도 ‘Big Change( 놀랄만한 커다란 변화)’라고 놀라고 있다.

 

지도자 한 사람의 先見之明과 가치관이 중국을 ‘아시아의 巨人’으로 만든 것이다. 몇 년 전 상하이를 방문한 북한의 실권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를 가리켜 ‘천지개벽’이라고 표현했다. 최근 북한 정권에서도 중국의 발전상을 본받아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하는 중이다.

중국 하면 華僑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화교들은 대부분 거주국의 국민을 상대로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華商’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화교들은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그들만의 집단인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고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거주국의 국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다.

화교들은 거주하는 국가의 언어를 습득하여 친밀감을 형성하지만 중국인들만 있는 공간에서는 자국 언어를 사용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화교들이 경영하는 기업들은 매출 규모에 비하여 협소한 사무실을 사용하고 적은 인원을 채용하면서 주로 가족들로 구성된 기업들이 많다. 족벌경영을 하다 보니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사업추진에 관한 결정은 가족이나 측근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편이고 같은 華商간의 거래 역시 인맥이나 정보의 정도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이것이 거주국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남아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인천광역시는 항구 도시로서 일찍이 구한말에 개항하여 화교1세들이 건너와서 정착하였다. 지금은 화교2세와 3세들이 성공하여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초기의 화교들은 주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중국이 경제개방을 시작한지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외국기업을 유치하여 저임금에다 ‘OEM방식’(주문자 생산방식)으로 하던 정책에서 탈피하여 자국의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해 임금을 올리고 자체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현재 ‘짝퉁의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IT산업, 자동차, 조선업 등 한국 기업의 직원을 거액의 돈으로 매수하여 대기업에서 수년간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개발한 프로젝트 자료를 유출하도록 사주하였다. 이 지료들이 중국 기업에서 활용한다면 앞으로 2~3년 안에 한국 기업을 따라잡을 것이고 한국 기업측은 막대한 손실을 받게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3. 참고 문헌


[1] 「현대 중국의 이해」, 한광수. 한창수, 한국 방송대학교출판부, 2004

[2] 「글로벌 경제와 뉴아시아」, 주명건, 서울, 세종연구원, 1999

[3] 「초강국으로 가는 중국」, W.H 오버홀드지음, 윤인웅 옮김,

                                 서울, 한국언어자료간행회, 1994

       

                  리포트 표지

               현대 중국의 이해 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