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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 Report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의 비교 고찰

 

                                   ♣      목   차     ♣




 1. 序 論


 2. 1910년대 세계 民族解放運動


 3. 3.1운동과 5.4운동의 民族運動 比較


 1) 3.1운동의 特徵과 意義

 2) 3.1운동의 展開樣相

 3) 5.4운동과 新文化運動

 4) 5.4운동의 展開樣相


 4. 結 論


 5.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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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序 論


 20세기초는 세계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난 시기였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世界大戰은 서구 제국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고유의 모순구조로부터 비롯된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모순이 결합하여 식민지로부터 탈출구를 찾고자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처럼 1910년대 후반은 민족문제에 대한 지각과 인식이 촉구되는 시기였으며 세계 여러 지역에서 민중운동에 의해 촉진되었다. 또한 제1차 대전중에 일어난 러시아 10월혁명은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문제 해결방향을 세계에 제시함으로써 전후 민족해방운동에 기폭제가 되었다.

 

 제1차 世界大戰이 발발하자 일본의 지배계급은 중국과 만주에 태평양 남양군도에서의 우선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대전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 따라 중국 침략을 강화하고 러시아 혁명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하면서 민족운동 세력들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여 만주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보장받고 독일 수중에 있던 산동성과 남양군도를 점령하고 중국에 ‘21개條’ 요구를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성공하고, 핀란드와 폴란드의 독립선언, 인도와 티베트에서 민족운동이 고조되는 등 국제정세의 변화로 反日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3.1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지식인과 학생들은 3.1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反日鬪爭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부터는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에 항거한 민족운동으로써 3.1운동과 5.4운동을 비교하고자 한다.


 2. 1910년대 세계 民族解放運動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운동을 고무시켰다.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불균형 발전으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植民地. 半植民地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윌슨대통령은 1918년 1월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병합하는 것을 저지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여 식민지 피억압민족에게 독립의 환상을 불어넣었다.


 레닌이 식민지 약소국의 민족문제를 처리하는 원칙으로 내놓은 ‘민족자결’과 표현은 같았지만, 윌슨은 ‘민족자결’의 대상을 전승국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뺀 일부 패전국의 식민지 또는 이 전쟁에 이바지한 일부 약소민족에만 국한시켰다. 윌슨의 선언은 세계대전 동안에 드러난 여러 피압박민족의 독립 열망과 레닌의 민족자결선언에 대한 제국주의의 대응이기도 했다.2)

 세계대전 뒤에 새로운 思潮로 나타난 ‘민족자결’은 우리 민족에게 반일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켰지만 일본 식민지인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라는 새로운 국제정세 속에서 독립에 대한 희망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차대전중의 러시아 10월혁명은 사회주의 진영의 민주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의 기초를 붕괴시켜 정치. 경제 면에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인 식민지 정책을 폭로하였다.3)

 

 러시아 혁명은 민족문제의 틀을 유럽에서의 강대 민족의 민족 압박에 대한 약소민족의 투쟁이라는 부분적 국내적인 문제로부터 식민지. 반식민지 투쟁이라는 피압박민족을 제국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한다고 하는 일반적.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하였으며, 동방의 민족해방운동과 서방의 사회주의운동을 연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사에서 1910년대 후반이라는 시점은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촉구되는 시기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대두한 민중운동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4)


 3. 3.1운동과 5.4운동의 民族運動 比較


 1) 3.1운동의 特徵과 意義

  독립운동의 주체는 민족으로서 독립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을 말한다.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은 근대 제국주의와 그의 식민지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5) 한국의 독립운동은 1894년 감오왜란에 대항하여 의병이 봉기하고, 동학농민전쟁이 다시 일어나 독립운동의 포문을 연 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구한말에는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나타났는데 1910년대는 거족적인 3.1운동의 결실을 맺었다.6)3.1운동 직전 정세의 기본적인 특징은 객관적 상황이 냉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이해와 의지와 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어가고 이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대중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운동의 고양이 예고되는 시점이었다.7) 

 

 2) 3.1운동의 전개양상

 3.1운동은 일제로부터의 분리와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로부터 비롯되었다. 운동에 참여하였던 민족자본가, 중소상공인, 도시소시민, 청년 학생, 일부 종교인, 지주, 부농들 사이에는 투항주의적이고 타협적인 경향에서부터 부르조아, 민족주의, 소시민적 민주주의,민족혁명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였고, 상층으로 갈수록 동요가 심하고 기회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민족자결주의다운 국민주권론에서 구하고 3.1운동에 일정하게 방향성을 부여하여 운동을 그들이 의존하던 대로 이끌려왔지만 식민지 사회주의의 특수성 때문에 사회적 기반이 취약하였다.

 이들은  또 시위를 사전에 조작하고 그 이념을 전국에 전파하였다. 운동이 퇴조한 후에는 각지에서 바로 국민대회 소집과 임시정부 설립을 요구할 정도로 정세에 민감하고 정치적으로 신속하게 움직였으나 이미 투쟁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기층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지도하고 내용을 내용을 담보할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


 청년학생과 진보적 지식인은 3월1일 시위를 조직하는 데서부터 운동의 이념을 선전하고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지방의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항상 앞장섰다.8)노동자 계급은 높은 계급적 결속력을 보이면서 운동 초기단계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참여하였고 농민은 비참한 식민지에서 뒤늦게 참여하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행동강령으로 삼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몰래 만든 독립산언서를 전국 주요도시에 배포하였다.9)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한 학생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3월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서 스스로 투항해버렸다.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한 학생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같은 시각에 평양, 의주, 원산, 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도 독립만세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10)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이후 학생들은 비폭력 시위에 들어갔고 일제는 시위 첫날부터 경찰은 물론 군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3) 5.4운동과 新文化運動

 新文化運動은 원세개 총통 지배하에서 독재정치와 제제운동, 孔敎를 국교로 하자는 복고적인 동조에 실망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운동이다.

1915년 진독수가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청년들의 사상을 계몽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고자했는데 북경대학교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11)

新文化運動은 新思想運動과 新文學運動으로 나누어진다.

 신문화운동이 한창이던 때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나 중국 지식인에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진독수, 이대조 등 신문화운동의 추진자들이 1919년 5월 ‘신청년’에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에 대한 소개를 하고 진독수가 공산당서기로 활동하면서 공산당기관지처럼 되어버렸다.

 이에 반발한 호적 등이 자유주의 성향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신청년’을 중심으로한 신문화운동이 활력을 잃고 말았다.

 

 신문학운동은 진독수와 호적이 중심이 되어 구어체언어인 白話文으로 작품을 썼는데 노신은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지어 중국 儒家의 도덕과 전략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舊思想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노신은 5.4운동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부상했고 그의 작품은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신청년’의 영향을 받아 각 지방에서도 청년들에 의하여 자주적인 사상운동을 전개한 단체가 나타났다.

 

 4) 5.4운동의 展開樣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청나라와 산둥의 권익을 탈취하였다. 1915년에는 산둥에서 독일의 정치. 경제. 군사적 권리를 계승한다는 21개조를 요구를 제출했는데 대총통인 원세개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21개條’ 요구를 기초로 베이징에서 비밀리에 남만주와 내몽골, 산둥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16년 원세개가 죽고 단기서가 군벌을 장악하자 일본은 단기서정권을 지원함으로써 중국에서 일본세력에서 확장하고자 했다.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받은 단기서는 일본과 ‘중일공동방적협정(1918.5)’을 맺었는데 일본군의 중국내에서 자유로운 행동, 군사기지 설정 및 일본군에 대한중국군의 예속을 초래하는 것이었다.12)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도 전승국의 자격으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다. 중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21개條’가 무효라고 주장하고 패전국 독일이 산둥성에서 가지고 있던 권익을 회수하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중국이 이미 ‘중일공동방적군사협정’을 체결해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파리대표단의 소식이 중국여론에 알려지면서 1919년 5월4일에 학생대표들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산둥성 ‘21개條’ 회수와 매국적 행위를 처벌하라.”는 구호를 내세워 시위를 하였고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13)


 이날이 5월4일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5.4운동으로 불린다. 중국정부는 시위를 주도한 학생 32명을 체포했다가 노동자들의 파업과 상점들이 집단으로 철시해 굴복하여 석방했다. 5.4운동으로 규탄을 받은 관료들이 파면되었고 내각도 산둥조약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였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일본은 비밀협정으로 인정된 특권에 대한 요구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1922년에는 9개국 공동조약이 맺어졌고 이로써 중국은 비로소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14)


 3. 結 論


 지금까지 1919년에 일어난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과 5.4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3.1운동과 5.4운동은 일본의 식민지와 반식민지 상태에서 권력층이 방관하고 있는 것을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자국의 주권과 자존심을 되찾은 권리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써 민족해방운동을 말한다. 중국은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반식민지화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36년동안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늘 애국심에 불타있었고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통치기구와 경찰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진압하였다. 초기에 민족대표를 자처하며 운동을 모의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지도력을 상실했고, 3.1운동의 주도권은 자연히 학생을 비롯한 민중세력으로 옮겨서 더욱 강경하게 대처했다. 비록 조직적으로 미숙함으로 인해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지만 3.1운동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자주성이 세계만방에 알려질 수 있었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중국의 5.4운동은 베이징대학교에서 채원배. 전독수. 호적 등 교수들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노동자. 농민. 상인 등 불평등강화조약인 산둥조약 조인 거부와 매국행위를 한 관리를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주권자로써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이면에는 新文化運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신문화운동은 백화문을 사용하여 국민들이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기에 지식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천안문사태에서도 단결된 힘을 보여준 것으로 5.4운동은 중국현대사에서 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4. 參考文獻


 (1) 조동결, 「한국 근대사의 이해와 윤리」, 서울, 지식산업사, 1998

 (2)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울, 도서출판 서해문집, 2004

 (3) 신승하, 「중국사」, 서울, 대한교과서, 1998

 (4) 「미래를 여는 역사」, 서울, 한겨레출판, 2007

 (5) 「함께 보는 한국 근대사」, 역사학 연구소편, 서울, 도서출판 서해문집, 2004

 (6) 「한국 근대민중운동사」49, 망원 한국사연구실, 서울, 도서출판 돌베개, 1996

 (7) 황인우저. 홍순도역, 「巨視 중국사」, 서울, 까치글방, 1997

 (8) 조너던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서울, 도서출판 이산,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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