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내양버스 부활(復活) ♧
나는 아직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고 급할 때가 아니면 택시를 타지 않는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마을버스와 시내버스이고 가끔씩 서울 방향으로 갈 때 전철을 이용하고 있다.
요즘에는 자가용과 전철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고 시내버스의 배차(配車) 간격이 짧아서 출퇴근시간대(Rush Hour)가 아니면 좌석이 남아돈다. 대부분 교통카드를 사용하고 있어서 승객들이 빠르게 승차할 수 있어 편리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내버스마다 안내양이라는 도우미제도가 있었다.
1960년대에 박정희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립되어 계획대로 시행되었다. 각 도시마다 공업단지를 건설하여 많은 여성인력이 필요했는데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어린 여성들이 가정의 생계를 돕기 위해 공단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서울역에는 매일같이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여성들이 보퉁이 하나만을 들고 내렸다. 그들이 가는 곳은 주로 공단이나 버스회사였다.
나는 1973년에 여상을 졸업하고 운수회사에서 경리과장으로 근무하시던 이모부님의 주선으로 구로동에 위치한 'ㅂ 운수회사‘의 경리사원으로 들어갔다.
‘ㅂ 운수’는 당시 서울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큰 회사였는데 버스가 백 대가 넘고 자체적으로 ‘자동차정비센터’를 가지고 있었다. 버스기사와 안내양들은 24시간씩 교대근무를 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안내양들은 회사에서 지은 숙소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안내양들은 버스회수권과 현금을 같이 받았는데 현금을 취급하다보니 회사에서 고용한 여자 사감 겸 관리자로부터 '센터‘라는 명목의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가끔씩 신문지상에는 버스안내양들이 절도혐의로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안내양들은 회사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근무복을 지급하기 때문에 옷값이 들지 않아서 월급 전부를 저축할 수 있었다. 알뜰한 안내양들은 시골에다 밭과 소를 사기도 했고 몇 년 후에 가게를 차려나가기도 했다.
나는 나 보다 나이가 위인 안내양한테 ‘**호 언니’라고 불렀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안내양들은 나한테 ‘미스최 언니’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무시하지 않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것을 무척 고마워했다.
나는 결혼을 몇 달 앞두고 회사를 그만두었고 결혼 후에도 별로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아서 안내양제도가 언제쯤 폐지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 충남 태안에서는 승하차를 돕고 관광홍보를 목적으로 안내양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버스 옆면에는 버스 안내양 그림과 함께 ‘오라이, 추억으로 가는 포구여행’이라는 문구를 붙였고, 버스 내부에는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포스터를 부착했다. 안내양은 예전과 똑같이 제복을 입고 돈 가방을 착용하고 버스 옆면을 탕탕 치면서 ‘오라이’ 나 ‘스톱’을 외치지만 직접 돈을 받지 않고 다만 승객의 승하차를 돕고 있는데 차를 탄 승객들로부터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호응이 대단하다고 한다. 태안에서는 앞으로도 승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안내양제도를 확대 배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는 디지털시대의 편리함을 느끼고 살면서도 때때로 아날로그를 그리워한다. 나는 갑자기 버스를 타면서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긋는 대신 안내양이 문을 열어주면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버스를 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友瑛 . 2006. January. 31
ㅂ운수 경리사원으로 근무할 당시의 나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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