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放送大學校
<Korea National Open University >
2013年度 中本學科 學士學位論文
『原爆문제와 被爆者에 대한 差別을 중심으로』
지도교수 : 이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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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目 次 ♠
Ⅰ. 序論------------------------------------2
Ⅱ. 本論------------------------------------2
1) 原子力과 放射能의 槪念
2) 原水爆禁止 세계대회
3)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郞)의 『히로시마 노트』에 나타난 원폭피해자의 증상과 피해사례
4)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 문제
Ⅲ. 結論------------------------------------7
Ⅳ. 參考文獻----------------------------------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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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945년 7월 베를린교외의 포츠담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는데 오로지 천황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일본은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과 싸우면서 항복 권유를 묵살하였다.
그 결과 미국이 도쿄 공습에 이어 8월 6일 히로시마에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우라늄235는 길이 3미터, 무게가 4톤으로 550미터 상공에서 버섯구름을 형성하면서 폭발했는데 지표면 온도가 태양열과 같은 6천도나 되어 불바다가 되었다.
원폭투하 첫 날에만 히로시마 인구 40만 명 중에서 10만 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들도 피가 응고되지 않고 적색반점으로 변하는 홍반이 생기면서 사망자가 늘어났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존한 원폭피해자들은 백혈병 등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서 방치된 채로 살아가고 있지만 본토지역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병원에서도 정확한 병명과 치료법을 알지 못하고 있고, 일본정부 역시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의 수탈로 인한 경제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거나 징용 등으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원폭피해를 입었지만 일본인과 차별하여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오에 겐자부로는 기자 신분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원폭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고통과 비참한 실상을 평화공감 르포형식으로 작성하여 『히로시마 노트』를 펴냈다.
2011년 동일본 후쿠시마에서 대지진으로 인하여 붕괴된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되어 생태계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후쿠시마원전 근해에서 잡은 수산물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방사능치수가 나와서 외국에서는 수입을 금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 논문에서는 원자력과 방사능의 개념과 원폭피해자들의 증상과 피해사례, 일본 정부의 대책에 대하여 논하고자 합니다.
Ⅱ. 본론
1) 원자력과 방사능의 개념
(1) 원자력의 개념
원자는 중심에 있는 원자핵과 원자를 둘러싸고 있는 전자에 의해서 구성된다. 20세기에 들어서 원자주위에 있는 전자가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주 강한 힘으로 결합된 핵자(核子)를 결합시키는 힘을 핵력(核力)이라고 한다. 그런데 핵은 안정적이지 않으며 인공적으로 입자를 핵에다 때려 넣으면 불안정화를 일으켜서 핵자(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결합이 깨져버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시기에 독일의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그리고 마이트너라는 여성 물리학자가 핵분열현상이 발견되자 방대한 에너지의 이용가능성을 발견하였다.
1930년 말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선을 침공한 것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원자탄개발은 독일에서 먼저 개발을 시작했다. 물리학자 시라드가 아인슈타인을 설득하여 나치독일이 원자탄을 손에 넣기 전에 미국정부에 원자탄 개발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원자탄 제조계획에 착수했다.
1942년 9월부터 맨해튼프로젝트가 수립되고, 마침내 핵무기개발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1945년 7월 뉴맥시코 사막에서 원자폭탄실험이 최초로 성공하였다.
핵분열 현상이 일어나면서 핵생성물이 생겨나는 것을 핵분열생성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죽음의 재’라고 부르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서도 죽음의 재가 발생했다.
(2) 방사능의 개념과 방사선 장애
방사능이란 단순히 방사선을 방출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가진 물질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원자핵을 불안정하게 만들면 그 결과 다량의 방사성물질이 배출된다.
방사성물질은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의 방사선을 방출한다. 방사선이 인체에 들어가면 신체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악영향을 미친다.
방사선은 원자폭탄이 폭발할 당시에 뿜어져 나온 후 버섯구름에 실려 ‘죽음의 재’를 선사한다.
방사선을 피폭함으로써 인체에 나타나는 변화를 방사선 장애라고 하는데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신체적 장애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장애로 나누어진다.
신체적 장애는 피폭 후 수 년에서 수십 년 후에 나타나는 백혈병이나 수명 단축, 태아에의 영향에서 나타나는 만발효과로 나타난다.
방사선을 피폭하더라도 사람의 감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없고 방사선장애의 중상이 나타날 때까지는 오래 걸리기 때문에 치료가 힘들고 완치가 곤란하다.
2) 原水爆禁止세계대회
1954년 3월1일 미국의 산호초 비키니섬에서 실시된 수소폭탄실험으로 인하여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어선 제5호 후쿠류마루(福龍丸)호 등 백 여척이 피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소폭탄 실험을 반대하는 국제여론이 고조되자 미국은 피폭자에게 피해를 배상했다. 이듬해인 1955년 8월6일 히로시마에서 제1회 원수폭금지 세계대회가 열렸다.
3)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郞)의 『히로시마 노트』에 나타난 원폭피해자의 증상과 피해사례
오에 겐자부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18세 때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대학에 입학하여 불문과 재학 중에는 사르트르에 심취하였다. 1960년에 젊은 작가를 대표하여 마오쩌둥을 만난 것을 계기로 정치적인 사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전쟁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썼다.
1958년 『사육』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고, 1994년 『만연 원년의 풋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지적장애아를 둔 아버지로서 『개인적인 체험』에서 기형아출산을 주제로 인권을 유린당하는 전후세대의 문제점을 파헤쳤다.
『히로시마 노트』는 오에 겐자부로가 1960년 여름에 히로시마를 처음 방문하였고 1963년과 1964년에 재방문하면서 원폭피해자들을 만나고 느낀 것들을 르포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원폭 이전의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군사도시였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은 히로시마에서 승선했고, 아시아 침략의 거점으로 크게 번창했다.
일본은 도쿄에 제1사령부를 두고, 히로시마에 제2사령부를 두었는데 미국은 히로시마를 괴멸시키는 것이 바로 일본을 괴멸시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나가사키 역시 군사도시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원폭 투하의 대상이 되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즉각적으로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사키도 원폭투하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히로시마에는 수많은 피폭환자들이 성인과 노인, 여자와 남자 가릴 것 없이 백혈병과 켈로이드를 감추고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사망했다.
요코즈나까지 올랐던 스모선수가 피폭 후 반신불수가 되었다가 피를 쏟고 사망하고, 남편의 시비를 페인트로 더럽힌 것에 분개한 부인이 자살하고, 피폭 후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단되자 목매 자살한 시인도 있다.
젖먹이 때 피폭한 젊은 여성이 기형아에 대한 공포로 불안에 떨다가 정상아를 출산했지만 몸이 회복되지 않아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작가 하라 다미키는 히로시마의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강요당할 때인 1945년에 < 여름 꽃>을 쓰고 1951년 자살했다.
오에 겐자부로가 히로시마를 찾았을 때 만난 사람들은 정부의 모호한 태도에 굴하지 않고 환자의 몸으로 원수폭금지 세계대회 평화행진에 참가했다.
녹음테이프에서 “원폭을 용서할 수 없다.”는 합창 소리와 구호가 낡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가운데 원폭환자들은 더위와 피로감으로 몰골이 꾀죄죄했지만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그들이 얼마나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지 절실하게 느껴진다.
히로시마에서 누구 보다 가장 고생하는 사람들은 의사들이다. 그들은 자신도 피폭한 상태에서도 환자를 돌보고 구호활동을 펼쳤다.
히로시마적십자병원에서 원장을 겸직하는 시게토 후미오 원폭병원 원장은 젊어서 1945년 원폭 투하 일주일 전에 부임했다. 젊은 시절 우연한 기회에 방사능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것이 핵폭발 이후 고독한 조사에 효과를 가져왔다.
원장은 히로시마에서 진료하면서 원폭증을 계속해 왔는데 끈질긴 통계에 힘입어 백혈병을 확고하게 연결시킨 것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나서였다.
일단 백혈병이 발병하면 그 환자는 약효에 따라 잠시 회복될 수는 있지만 6개월 혹은 1년 정도 짧은 기간 동안만 생명을 연장시킬 뿐이다. 다시 백혈구가 증가하면 치명적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1년 후 히로시마를 다시 찾았을 때 47명의 환자가 사망했다.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에서 미야모토 사다오씨가 “제9회 세계대회의 성공을 빕니다.”라고 말하고 꽃다발을 받자마자 원폭병원으로 들어갔는데 몇 달 후 전신쇠약으로 사망했다. 시게토 원폭병원원장도 “그저 원폭이 생명저항력의 본질적 부분에 큰 결함을 초래했다.”고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1945년 가을 미군 원폭재해조사단이 발표한 “원자폭탄 방사능의 영향으로 죽을 사람은 이미 다 죽었고, 잔존 방사능에 의한 생리적 영향은 인정되지 않는다.”라는 잘못된 성명이 세상에 유포되고 난 후 10년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피폭 이후 10년 동안 현지 신문인 <주고쿠신문>의 인쇄소조차 원폭 또는 방사능이라는 활자를 담아내지 못했다. 가나이 논설위원은 지난 19년 동안 참아왔는데 원수폭피해백서 계획을 제안했다.
“원폭은 위력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까? 아니면 인간적 비참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까?”하고 질문을 던진다.
19년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 피폭으로 한쪽 눈을 잃은 모리타키 교수는 피폭자와의 간담회에서 피폭으로 양쪽 눈을 잃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를 증언했다.
미국 통신사의 도쿄지국장이 친구한테 한국전쟁의 전횡을 얘기하다가 “지금 한반도에 원자폭탄 두세 발 떨어뜨리면 전쟁이 끝날 것 같은데 피폭한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그 두 세 발의 원폭으로 전쟁이 끝나면 미국은 세계의 지배자가 될지 모르지만, 그땐 누구도 더 이상 미국을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그리고 그는 몇 년 후 사망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당시 트루먼대통령한테 원폭 투하를 건의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도 하마터면 히로시마처럼 원폭 피해지역이 될 뻔했으니 천만다행이다.
<주고쿠신문>이 원폭기념일을 전후해서 특집으로 게재한 ‘히로시마의 증언’이라는 연재기사에서 자살 보다 더 끔찍한 수렁에 빠져있는 노인을 다루었다.
87세 노인은 아이의 부모가 먼저 죽어서 손자를 키웠는데 손자가 원폭증으로 죽자 미쳐버려서 손자한테 혼잣말을 한다고 했다.
<히로시마 원폭의료사>에 따르면 피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는 298명의 의사가 있었다. 그들은 방공업무종사령서에 따라 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원폭으로 의사 60명이 죽고 시내의 부상자는 10만 명도 넘었다. 젊은 의사가 양손이 골절되고 반신화상이라는 중상을 입고 구조활동에 참가하다가 절망감으로 자살했다.
얼마 안 되는 숫자에 부상을 입은 의사들이 머큐로크롬과 기름으로 10만이 넘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겠다는 만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구조자들의 저돌적인 노력이야말로 대홍수 이후 히로시마에서 찾은 희망의 첫 징후였다.
4)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 문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한국인도 7만 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아남은 한국인 중 2만5천여 명이 귀국했지만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다녀야 했고, 원폭후유증올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일본정부는 1957년 ‘원자폭탄 피폭자 의료 등에 관한 법률’과 1968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조치법’ 1994년 ‘원자폭탄 피폭자의 원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자국의 원폭피해자 1세 35만여 명에게 각종 복지혜택을 제공해 왔다.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급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고가의 정밀 검사와 치료는 물론 생활비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정부는 외국인 원폭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고수해 왔기 때문에 대부분 귀국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일본으로부터 아무런 국가보상을 받지 못했다. 일본정부가 내세우는 논리에 따르면 일본 국적을 포기한 옛 식민지 주민은 이제 일본인이 아니므로 당연히 일본 국내법에 저촉받지 않는다. 일본도 피해자라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1970년 원폭피해자 1세 손진두씨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피폭자 건강수첩’을 취득하기 위한 밀항을 시도하여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고 일본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일본정부에서 피폭자가 일본에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병원 치료비와 수당 지급이 없는 제한적인 원호법 적용을 발표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상 일본으로 갈 수 없는 원폭피해자에게는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 정부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1970년생인 김형률씨는 외조부와 외조모가 히로시마로 이주하여 어머니를 낳았는데 히로시마 원폭으로 원폭환자 2세대가 되었다.
2002년 자신이 원폭 2세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원폭 피해자 문제를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피해자 실태조사를 이끌어냈다.
2005년에는 일본 고등법원으로부터 원폭피해를 당한 징용자한테 배상하라고 했다가 판결 후 8일 만에 최고재판소에 상고하였다.
김형률씨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2005년 5월20일부터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심포지엄에서 ‘한국원자폭탄피해자와 원자폭탄 2세환우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한 특별법 제정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한국의 특별법 제정을 알렸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지 닷새 만에 사망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원폭 2세를 위하여 앞장선 김형률씨한테 경의를 보낸다.
Ⅳ. 결론
지금까지 원자력과 방사능의 개념과 원폭피해자들의 증상과 피해사례, 일본 정부의 피폭자에 대한 차별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연합국의 대립에서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전쟁 막바지에 패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항복하지 않은 것은 천황의 독단 때문이었다. 나가사키가 피폭한 시간에도 어전회의 중이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시험 대상을 찾고 있던 차에 히로시마를 피폭하여 막대한 인명살상과 피해를 야기했다.
히로시마에서 원폭환자들이 후유증으로 고생하는데 미국은 한국전쟁에서도 중공군한테 전세가 밀리게 되자 원폭사용을 건의했다고 하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적국이던 미국과 손을 잡았고,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원폭환자들을 소홀하게 다루었다.
원자력의 이용으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수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의 대체연료로서 활용하고 있지만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경험하면서 원자력의 위험성이 강조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히로시마 노트』에서는 1960년대 원폭피해자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모습도 있지만, 자신도 같은 원폭환자이면서도 원폭환자들을 살려보려는 정성과 관심어린 휴머니즘이 녹아져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히로시마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더 이상 핵실험은 없어야 한다고 외친다.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로 원폭 피해자들이 대를 이어 天刑처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정부와 사회에서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Ⅳ. 參考文獻
1) 『히로시마 노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지음, 이애숙 옮김, 삼천리, 2012
2)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다카기 진자부로지음,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11
3) 『원자력 발전』, 장병주. 이창섭 공저, 학문사, 1995
4) 『일본 근대사』, 강동진 저, 서울 한길사, 1985
5) 『이야기로 배우는 일본의 역사』, 가쿠고조 감수, 양억관 옮김, 고려원 미디어, 1995
6)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원폭 2세환우 김형률 평전」,전진성 지음, (주) 휴머니스트출판그룹,2008
7) 『인터넷』, 키워드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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