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開港과 近代史 속의 인천 ♠
인천은 구한말인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하여 문호(門戶)를 開放하여 부산. 원산과 함께 3대 개항장의 하나로 1883년 1월에 개항하였는데 대한민국의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韓中日 개항장으로는 1899년에 개항한 군산을 비롯하여 목포(1897년), 부산(1876년), 상하이(1843년), 요코하마(1859년) 등이 있었다.
한국은 개항과 더불어 격동과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였고 인천은 수도 서울과 인접해있다는 이유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다른 도시 보다 급속하게 변화를 시도했다.
해안가가 확장되어 巨船이 출항할 수 있도록 인천항이 축항(築港)되었고 항구를 통하여 외래문물이 유입되면서 도시기반이 형성되었다.
인천은 유입된 문물을 활용할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으며 나라 전체를 변화시키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인천에 변화에 알맞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식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어린 학생들이 서당 대신 소학교나 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들 초등교육기관에서 근대식 학문의 기초를 배운 다음 중등학교와 영어와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외국인 하교에서 실력을 쌓았다. 초기 초등교육기관으로는 영화학당과 창영초등학교가 있다.
인천은 개항 후 어촌과 농촌이 근대도시로 변모되었고, 전기와 수도 시설이 들어섰다. 새로 형성된 근대산업. 상업교통. 교육. 문화시설 등이 설치되어 인천사람 외에도 전국민이 이들 사업장에 종사하게 되었다.
항만의 구축으로 출입이 자유로워지자 수많은 외국인들이 인천에 들어와서 활동하였다.
1899년 9월 경인철도의 개통으로 종전에 12시간 이상 걸리던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33km의 거리를 1시간 40분으로 단축시켰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온갖 물자가 유입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항구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개항 후 한국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공존하였다.
前者는 조상 대대로 전래되어 온 생활용품을 사용하였고, 後者는 외국 문물을 적극 권장하고 직접 문물의 유입을 선호하였다.
개항 후 인천에는 많은 볼거리와 명소가 생겨났다. 월미도와 송도 주변은 관광명소로 개발되었고 동인천 주변에는 중심시가지로 개발되어 변화를 가져왔고 근대식 공원이 들어섰다.
友瑛. 2008. March. 4
인천 개항자료전시관 입구
한국, 중국,일본 개항장의 모습
전시관 내부
전시관 입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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