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母校 서림초등학교와 인천여자중학교 방문 ♥
사람은 누구나 고향이 있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5년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서 태어났다. 괴산이 고향이신 아버지와 증평이 고향이신 어머니는 중매결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만주에 가셔서 자동차운전과 정비기술을 배우셔서 군대에서는 운전병으로 복무하셨다. 제대 후에는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지 않고 외가인 인천으로 오셔서 택시를 운전하셨다.
나는 2년 동안 시골에 남겨졌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인천으로 올라왔다. 나는 정월 생이라서 7살에 입학을 했다. 처음에는 답동에서 살았는데 [신흥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집이 철거가 되는 바람에 부처산 아래에 있는 산동네로 이사를 하고 2학년때 [서림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여 졸업하였다. 초등학교에서는 가난했지만 항상 공부를 잘 해서 분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에는 일류(一流)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하여 초등학교에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켰다. 부잣집 친구들은 담임선생님한테 그룹과외지도를 받았는데 나는 집이 가난해서 참고서만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학교마다 일류 중학교에 많이 진학을 해야만 좋은 학교로 평가되고 그렇지 않으면 일명 ‘똥통학교’라는 오명(汚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은 매일같이 과중한 숙제를 내주시고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들을 회초리로 엄격하게 체벌로써 다루었다. 체벌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분단장까지 연대책임으로 가해졌는데 내가 속한 분단에서는 매일 한 두 명이 숙제를 하지 않아서 같이 벌을 서야했다. 그래서 내가 해온 숙제를 보여주고 해결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빈부격차(貧富格差)가 매우 심해서 부잣집에서는 운전기사와 가정부가 살고 있었고 입주과외 대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서림초등학교]는 인천시에서 가장 학생 수가 많은 학교였다. 당시에는 한 반에 보통 60명이상 되었는데 15반까지 있었고 전교생의 수가 6천명에 육박했다. 각 반에서 내노라하는 학생들이 경기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알려진 [인천여중]과 [인천중학교]에 가기 위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특별지도를 받았다.
나는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됐지만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학교로 오시게 하여 “요즘은 여자도 배워야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고 결혼도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아마도 내가 공부를 못했다면 최종학력이 초등학교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담임선생님이 “이왕이면 [인천여중]을 목표로 하라.”고 하셔서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 당시에 [인천여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웠다. 당시에는 중학교에서도 후기 모집이 있었고 재수(再修)가 성행했다. 나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했던 한정옥이라는 친구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나는 그녀의 집에 자주 놀려가서 같이 공부를 했다. 그녀는 [경기여중]에 응시했다가 불합격하고 [인천여중] 바로 아래인 [상인천여중]에 후기로 합격했다.
나는 [인천여중]에 무난히 합격을 했고 교사가 되기 위해 꿈에 부풀어있었다. 나는 사복이 없었는데 오히려 자신 있게 교복을 입고 외출했다.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다녀올 때도 교복을 입고 갔는데 아버지께서 ‘일류 여자중학교’에 다닌다고 자랑을 하셨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일 뿐 1학년 2학기에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백일 쯤 되자 소아마비로 판명되어 집안 분위기는 항상 우울하였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술에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막내를 안고 울고 있었다. 나는 시험기간이면 학교 도서관이나 친구 집에서 시험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중상위권이던 성적은 갈수록 하락하기 시작했다. 3학년에 올라가고부터는 아예 실업계로 가려고 마음먹고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인천여중]과 [인일여고]는 동일계학교인데 [인천여중]이 420명이고, [인일여고]가 300명 정원이라서 친구들 간에도 서로 경쟁을 하였다. 반에서 중상위권이면 [인일여고]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인일여고]만 합격하면 교대는 합격이 보장되었다. 당시 [제물포고등학교]가 [서울대학교]에 백 명이상 합격을 하고 [인일여고]는 60명이상 합격할 만큼 명문(名門)이었다.
나는 결국 실업계여고로 진학을 했고 [인천여중]동창들을 만나게 될까봐 동인천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다니다시피 했다.
나는 가끔 동인천에 볼 일이 있어서 나가는데 멀리 [인천여중]의 둥근 모양의 교사(校舍)가 보인다. 자유공원에서도 학교가 보이는데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만일 막내가 소아마비에 결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1967년에 입학을 해서 1970년 1월20일에 졸업했는데 제20회 졸업생이다. 벌써 햇수로 35년이 지났다. 나는 디카를 들고 [서림초등학교]와 [인천여자중학교]의 사진을 찍으러 나섰다. [인천여중]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인일여고]만 남아있다. 하지만 예전에 공부하던 학교라서 여학생이 학교 밖에서 들어오기에 [인천여중] 졸업생이라고 하고 셔터를 눌러달라고 하니까 흔쾌히 사진을 찍어준다. 마음 편하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그녀들이 부럽다.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예전에 내가 연못가에 앉아서 사춘기 시절을 보낸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정겹게 느껴진다. 연못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정문 쪽에 있던 아치가 옮겨져 있다.
[서림초등학교]에 찾아갔더니 정문 앞에서 3학년쯤 되는 학생들이 놀고 있다. 나는 천막교실에서도 공부를 했는데 학교가 말끔하게 단장을 하고 예전 보다 운동장도 더 넓어 보인다. 학교 전경을 찍고 학생에게 부탁하여 독사진을 찍었다.
[서림초등학교]는 나한테 희망을 갖게 해주었고 [인천여중]은 자신감을 부여하였고, [방송대학교]는 ‘학력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母校는 마음의 고향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나의 母校를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友瑛 2005. October. 19
서림초등학교 전경
서림초등학교에서...
인천여중 뒷편 산책로와 벤치
둥근 모양의 교실
1층에는 1학년이 공부를 하고, 3층에는 3학년이 공부를 했는데 옥상에서 인천시내 전경이 다 보인다.
내가 점심시간에 꿈을 꾸었던 연못과 분수대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있다.
학교 정문에 있는 신사임당상
예전 인천여중 교실을 배경으로...
신사임당상 앞에서...
자랑스러운 인천여중 학창시절
방송대학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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